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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호르몬 안 줄이면 후세대 없어
‘환경호르몬의 습격’은 생리통 증상을 적은 여학생들의 설문지에서 시작되었다. ‘10대 청소년들의 부인과 질환 급증’이라는 주제로 프로그램을 만들려고 사실 확인 차원에서 간단히 실시한 설문조사였는데 뜻밖에도 아이들의 생리통에 대한 피맺힌 절규를 보게 되었던 것이다. ‘군대 가는 게 낫다’, ‘남자이고 싶다’는 점잖은 축이고 ‘아랫도리를 잘라버리고 싶다’가 보통이었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프로그램은 생리통의 원인을 파악하는 쪽으로 방향을 바꾸었고 그 원인을 찾다보니 환경호르몬이 나왔다. 그때부터는 정신을 차릴 수 없는 충격의 연속이었다. 10대 청소년 18명을 데리고 자궁내막증 진단을 받던 날, 그중 16명이 자궁내막증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온종일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40년간 소아과 의사로 일한 도리스 랩 박사는 아기의 고추가 점점 작아지고 있다고 했고 미국의 요도하열 발생률은 신생아 125명 중 1명이었으며, 미국 환경청 실험실에서는 환경호르몬의 일종인 프탈레이트에 노출된 수컷 쥐가 암컷 생식기를 달고 있었고, 플로리다에서는 고추가 없는 세살난 남자아이가 몰놀이를 하고 있었다. 사람의 몸에 들어와 호르몬과 유사한 작용을 하는 물질은 태초부터 존재해 왔다. 콩에 들어 있는 제니스틴 같은 식물성 에스트로겐이 그런 것들이다. 인류는 수만년의 진화 과정을 통해 이런 외계의 호르몬성 물질에 적응해 왔다. 그래서 사람의 몸은 이들 식물성 에스트로겐을 잘 인식하고 쉽게 배출하며 때로는 몸에 이로운 방향으로 이용하기도 한다.
그런데 인류는 지난 50여년 동안 엄청난 양의 석유화학제품들을 만들어 쓰기 시작했고 이들 중에 우연히 호르몬과 유사한 것들이 생겨났다. 호르몬과 유사한 합성물질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지도 채 20년이 되지 않는다. 그러니 사람의 몸이 이런 물질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수만년의 세월이 흐른 뒤, 인간이 이런 환경호르몬에 완벽히 적응하는 존재가 되어 있을 수 있을까? 대답은 아니오다. 환경호르몬은 인간의 생식능력을 공격하고 있기 때문이다.
왜 환경호르몬은 하필 성호르몬을 흉내내는 것일까? 아드레날린이나 성장 호르몬을 흉내내는 환경호르몬은 왜 없는 것일까? 프로그램을 만드는 내내 이런 의문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아마도 성호르몬이 가장 먼저 만들어진 신호전달 물질이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생식과 종족 보존이 모든 개체의 목적이므로 수만년 전 지구상에 살았던 동물의 화석인 석유 속 어딘가에 남아 있던 성호르몬의 구조가 가공 공정을 거치면서도 끈질기게 살아남아 있는 게 아닐까?
어찌되었든 지금 당장 이런 물질의 사용을 줄여나가지 않으면 우리 다음 세대에게는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 석유화학제품의 사용을 줄여 다행히 종족 보존에 성공하더라도 후세대로부터 플라스틱 같은 유해물질을 그릇으로 사용한 무지한 선조라는 오명을 벗기는 어렵겠지만.
유진규 피디/〈에스비에스 스페셜〉 ‘환경호르몬의 습격’ 연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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