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자유 이야기 /
문수사로 가는 길엔 겨울이 엄습했다. 산객들의 목을 축여주던 샘터도 먼 해빙을 기다리고 있을 뿐 뻥 뚫린 나목사이로 시퍼런 하늘만이 곧 찾아들 햇살의 서막을 일러주고 있다. 느리게 올라선 안부에는 하얗게 겨울을 이고 선 천왕봉이 손에 잡힐 듯 다가서는데 그 고즈녁함을 깨는 듯 때 아닌 산새 조무래기 떼가 촘촘히 박힌 솔방을 사이로 씨앗을 빼먹느라 분주하다. 동한기에 솔방울이라도 남아 산짐승들의 목숨을 연명해 주니 다행이다. 나눈다는 것이 이런 것이다. 덕분에 산길은 온통 은은한 솔향기로 뒤덮혔다. 언 고갯길을 내려서니 응달엔 눈이 지천이다. 선답자의 발자국이 오롯하게 길을 안내해 준다. 깡마른 나뭇가지도 인적이 살가운지 터널을 만들었다. 굳이 이정표가 없어도 길은 열린다. 무언의 나눔과 배려들이 은은하고 질펀하게 전해지는 까닭이다. 이런 느낌은 빠르지 않아야 가능하다. 길섶 겨울 편린을 만날 수 있고 추워서 더 견고해지는 따스함들을 나눌 수 있기 때문이다. 암자로 가는 길은 그래서 더디게 걸어야 제맛이다. 어느새 오른 햇살이 문수사의 겨울을 녹이고 있다. 노스님은 꽁꽁 동여 메고 마당을 거닐며 몸을 추스르고 계신다. 처마밑엔 고드름이 풍경처럼 청아하고 장독대 너머로 삼봉과 금대산이 하늘빛과 한바탕 풍채를 겨루고 있다. 망망대해 같은 너른 바다가 산에도 있다. 풍랑이 없으니 서둘게 없다. 바라만 보아도 다 내 것인데 욕심인들 솟을까. 시끄러운 세상이라고 하지만 여기에 서면 내 숨소리마저 소음일까 두렵다. 고요하게 일렁이는 암자와 산의 소리에 마음도 덩달아 완만해진다.
스님은 빨간 오미자 차를 나누어 주시며 이른 산객의 부지런함을 칭송하신다. 배낭 속에 든 귤과 떡을 답품으로 드리니 귀한 산물을 받았다며 합장 한다. 노 스님은 이틀이 멀다하고 산아래 마을까지 오르내리며 운동을 하신다고 한다. 오르고 내려서면서 산길에서 일어나는 미미한 변화들을 함께 느끼면서 수행에 필요한 건강을 챙긴다고 하신다. 나같은 중생이 보기엔 그저 이런 수행처에 앉아 세상풍광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삶이 넉넉하게 채워질것만 같은데 노스님의 각별한 건강관리법이 새삼 경외스럽다.
혼자 있어도 동행과 소통의 경지를 체험케 해주는 해우소며, 맑은 샘터와 빛바랜 암자의 나무 기둥과 처마의 고드름과 장독과 스님의 신발까지 놓치지 않고 담아본다. 횡하니 스쳐가는 암자가 아니라 머물고 느껴보는 느린 채움을 만끽해 보고 싶어서다. 이렇게 다져진 생각과 느낌들이 얼마나 내 일상을 활기차게 만드는지 나는 알고 있기에.
산중 절집이나 암자를 찾는 일은 이제 오랜 산행의 요체가 되었다. 인적 없는 고도에 낙락장송처럼 세상을 바라보는 암자길을 느리게 한발 한발 오르다보면 북사면을 넘어오는 삭풍도 풍경소리처럼 들린다. 빨라서 보지도 듣지도 못한 사연들을 나는 암자로 오르며 만난다. 그 느림의 길은 내 삶의 고속도로요 자유다. 빠르게 종횡하는 일상이 고단하다면 산중 오롯한 길을 따라 암자로 떠나볼 일이다. 느리게 아주 느리게 말이다.
이용호/경남 사천시 선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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