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자유 이야기 /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급한 성격 때문인지 생각한 것을 바로 행동으로 옮겨야만 직성이 풀리는 뇌의 회로 때문인지는 몰라도 나는 언제나 바쁘고 만족을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어렸을 때의 별명도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는 ‘홍길동’이다.
대학 다닐 때도 전공 공부를 진득하니 하지 못하고 사회경험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음식점 서빙을 하며 돈을 벌고, 액세서리 좌판을 하다 망해 보기도 여러 번이었다. 대학 2학년 때는 남보다 먼저 영어를 배워야겠다며 과에서 가장 먼저 어학연수를 다녀왔고 휴학으로 남보다 취업이 늦어졌다는 조급함에 졸업 한 학기를 남겨두고 지역에 있는 방송국의 구성작가 일을 시작하였다.
정신없이 방송 일을 하며 2년을 보내고 그 일이 손에 익을 무렵에는 또다른 무엇인가를 하고 싶은 욕심이 나의 내면에서 꿈틀거렸다. 맡은 프로그램이 끝나자마자 바로 서울에 와서 콘서트 기획 일을 맡아서 몇 달을 밤잠을 설쳐가며 일해 몸을 혹사시켰다. 몸이라는 기계에 제대로 기름칠도 해주지 않으면서 24시간 풀가동시킨 지난 9년의 세월 동안 남은 것은 서른이란 나이에 걸맞지 않게 생긴 관절염과 스트레스로 인한 의욕상실이었다.
삼십분만 걸어도 무릎이 지끈거려 더 이상 걸을 수 없게 된 처지에 대한 원망은 그동안 몸을 제대로 돌보지 않은 자신에 대한 자책으로 이어졌다. 평지를 꾸준히 걸으라는 의사의 충고를 제대로 듣지 않았던 나는 그제야 비로소 하이힐을 벗어던지고 운동화를 신고 걷기 시작했다. 동네 아파트 공원의 가로수길을 걸으며 떨어진 낙엽도 밟아보고 벤치에 앉아서 혼자만의 여유를 갖기도 하였다. 바쁘다는 핑계로 읽지 않았던 책들을 도서관에 가서 몇 시간이고 앉아 읽을 때면 직장을 다닐 때보다 훨씬 더 지식의 내공이 쌓이는 기쁨을 갖는다.
영화 보는 그 두 시간이 아깝다면서 애써 내 안의 감수성을 무시했던 예전의 나는 어디가고 요즘 일주일에 두 편씩 조조 영화를 보며 혼자 울고 웃고 감동을 받는다. 왜 예전에는 운동하는 시간이 아깝다고 생각을 했는지, 밥 먹는 시간조차 아까워 두 끼를 폭식하고 소화제를 달고 살았는지 지금 생각해보면 헛웃음이 나올 일이다. 그렇게 내 삶의 부족했던 부분을 채우는 일련의 과정을 거친 결과, 물먹은 솜처럼 처졌던 내 육체와 정신은 지금 조금씩 활기를 되찾고 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지금까지 내 삶은 한 순간도 쉼없이 진행되었지만 그럼에도 늘 뭔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나를 못 견디게 했다. 누구보다 빨리 가고 싶어 안달복달했던 나는 육체의 질병조차 앞길을 막는 방해자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느림의 미학을 알려준 고마운 스승이었다. ‘빨리, 무조건 남보다 빨리’에서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로 삶의 모토가 바뀐 지금, 나는 예전보다 더 여유 있고 진정한 삶의 자유를 누리게 되었다.
장민옥/서울시 관악구 봉천7동
‘느림’을 통해 자유를 늘리는 나만의 방법은 무엇인가요? 걷기, 불끄고 지내기, 돈 안쓰고 지내는 실천법도 좋겠습니다. 비결을 나눴으면 합니다. edge@hani.co.kr로 글(200자 원고지 6장 분량)과 연락처를 보내주세요. 채택되면 고료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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