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봉 /문학전문기자
최재봉의 문학풍경 /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해변의 카프카>는 천황의 전쟁 책임을 은폐하고 일본인들로 하여금 전쟁과 피식민지인들에 대한 가해의 기억을 지워버리도록 하는 ‘치유’의 기능을 하고 있다.”
국내에도 2003년에 번역 소개된 <해변의 카프카>를 일본의 전쟁 책임 회피 기도와 관련해 비판하는 견해가 나왔다. 일본 도쿄대의 고모리 요이치 교수(도쿄대대학원 종합문화연구과 언어정보과학전공)가 30일 오후 3시 고려대백주년기념관 국제원격회의실에서 열리는 고려대·도쿄대 합동연구 세미나 ‘동아시아에서 무라카미 하루키를 읽다’에서 발표할 내용이다. ‘기억의 소거와 역사 인식’이라는 제목으로 미리 배포한 발제문에서 고모리 교수는 “국가가 수행했던 침략전쟁 하의 조직적 ‘강간’의 기억을 잠시 동안 상기하고, 다음 순간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기억에서 지워버리는 <해변의 카프카>의 소설 텍스트 운동은, ‘종군위안부’ 문제를 없었던 것으로 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는, ‘치유’를 가져다 주는 기능을 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해변의 카프카>는 ‘카프카’로 이름을 바꾼 열다섯 살 소년을 주인공 삼아 선과 악, 존재와 폭력, 기억과 망각의 문제를 파고든 작품이다. 그리스 비극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일본 고전 <겐지 이야기>의 생령 모티프, 2차대전의 상흔 등이 어우러진 이 소설은 아시아와 유럽, 미국 등에서 두루 번역되었으며, 무라카미 하루키는 지난해 ‘프란츠 카프카상’을 수상하고 노벨문학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고모리 교수는 지난해 <무라카미 하루키론‘해변의 카프카’를 정독한다>라는 책을 낸 바 있다. 30일 발제문은 이 책의 내용을 요약한 셈이다. 고모리 교수에 따르면 <해변의 카프카>는 일본 사회가 필요로 하는 ‘치유’의 목적을 위해 소비되고 있다. 이 소설에서 태평양전쟁 말기 학생을 구타함으로써 실신과 기억상실을 야기했던 여교사는, 자신의 남편이 필리핀에서 전사한 것을 그에 대한 죄 갚음으로 받아들인다. 고모리 교수는 여교사의 이런 인식이 “쇼와 천황 히로히토의 전쟁책임과 전후책임을 면책하게 되는” 결과를 낳는다고 지적한다. 일본 독자들이 이 소설을 읽으면서 제국주의적 침략전쟁 자체를 ‘어쩔 수 없었던 일’로 ‘치유’하고 넘어가게 된다는 것이다.
같은 세미나에서 ‘전후 일본의 일그러짐 속의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제목으로 발표하는 친깡 베이징대 일본학연구센터 교수는 <해변의 카프카>의 주인공 소년이 세계의 본질을 폭력으로 파악하는 태도에 주목하면서, “전쟁의 논리를 주인공이 내면화하고 상상적으로 실천함으로써” “전쟁과 폭력이 발생하는 이면에는 무엇이 있는가(하는) 문제에 대한 물음이 일체 결여되어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하루키 문학을 흔히 비일본적·탈일본적인 것으로 평가하는 견해의 위험성을 지적함과 아울러, 하루키 세대는 학생운동의 좌절로써 ‘상징적인 아버지 살해’에 실패했으며 그 결과 오늘날 일본 사회의 우익화 풍조에 큰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다. 결론적으로 “무국적, 도시문학, 포스트모더니즘 등의 꼬리표를 떼내고 무라카미 문학을 다시 한번 전후 일본의 개별적인 역사성 속에 위치 짓고 다시 검증하는 것이야말로 ‘무라카미 현상’이 지닌 의미를 사색하는 본래의 길일 것”이라고 친깡 교수는 강조했다.
한편 <해변의 카프카>의 번역자이기도 한 김춘미 고려대 교수는 ‘한국에서의 무라카미 하루키그 외연과 내포’라는 제목의 발제문에서 하루키 소설 속의 공허감, 상실감, 방황이 이른바 ‘386 세대’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킨 사실을 지적하면서, 고모리 교수의 하루키 비판을 단순히 수용하는 데에서 더 나아가 “스스로의 문맥에 근거하여 재구축할 필요”를 상기시켰다.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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