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하는 중국, 변하지 않는 중국 ⑧
14년 전의 일이다. 내가 상상 속의 중국이 아니라 현실의 중국과 처음 만난 것은. 중국의 고전이나 중국에 관한 책들을 읽으며 얼마나 ‘글자가 없는 진짜 책(無字天書)’을 볼 수 있기를 고대했던가. ‘여산’ 속에 있기 때문에 도리어 ‘여산’의 진면목을 모르게 될지라도 나는 ‘여산’에 가보고 싶었다. 그러다가 진짜로 ‘여산’에 갈 수 있었다.
오랫동안 중국은 우리에게 자유롭게 왕래할 수 없는 나라였기에 더욱더 모든 것이 새록새록 했다. 그들이 무심코 지었던 표정 하나에도 마치 격동의 현대사 비밀이 숨어 있는 듯이 진지하게 바라보곤 했었다. 공원도 아닌 어두컴컴한 지하도에서 라디오 음악을 틀어놓고 중년 남녀가 너무도 자연스럽게 춤을 추거나 노인들이 주위를 신경 쓰지 않고 목청껏 경극의 한 대목을 읊조리던 모습 하나 하나가 모두 이채로웠다.
그런데 나 같은 이방인의 눈에 더욱 신기한 것은 구경하기 좋아하는 중국 사람들이 그런 풍경에 대해 전혀 신기해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매우 예외적이고 우연적인 일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아직도 뇌리에 깊이 남아 있다. 한번은 버스 안에서 남녀가 부둥켜안고 있는 장면을 목도했는데 다른 승객들이 전혀 개의치 않았다. 학생들이 선생님에게 깎듯이 인사하지도 않았고 선배와 후배의 구분도 별로 없어 보였다. 중국 음식에 적응하지 못해 가끔 들르곤 하던 당시 새로 생긴 맥도널드 햄버거 가게에서는 젊은이들뿐만 아니라 노인들도 찾아와서 줄서 기다리며 진지하게 ‘서양’을 맛보고 싶어 했다.
한번은 나이트클럽에도 가보았는데 아주 나이 지긋한 분이 마치 체조를 배우듯 디스코 춤을 열심히 따라 추고 있는데 주변의 젊은이들이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우리 같았으면 물을 흐린다고 눈치를 주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었을 텐데, 그렇지 않았다. 매우 세련되고도 섬세하게 눈치를 주었기 때문에 눈치없는 내가 알아채지 못했을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이런 모습을 보고 나는 중국 사람들은 매우 실용적이고 서양적이구나 하는 막연한 생각을 했다.
다른 한편 자전거를 타고 누비던 골목 속에서는 예전에 어린 시절 시골에서 보았음직한 사물들과 자주 마주치게 되어 아련한 향수마저 일었다. 지금과 비교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현대식 건물이 즐비한 톈안먼 광장 앞 창안거리를 마부가 태연히 말 달구지를 끌고 가는 일도 많았다. “그대에게 묻노니 어떻게 그러할 수 있소. 마음이 초연하니 땅이 저절로 편벽해지네”라는 도연명의 싯귀처럼 내가 별안간 저 궁벽한 시골에 서 있는 듯한 착각이 들기도 했었다. 평소에 막연히 서로 조화되기 어려운 이질적인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그들에게서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융화되고 있었다. 엊그제 같던 그 때가 벌써 14년 전이라니!
장사치 뜻하는 ‘샤하이’ 유행어
난징루 건너편의 푸둥 신시가지 야경. 새 중국 얼굴이다.
최근에 출판된 <80년대 방담록>이라는 책을 읽다 보니 처음 중국에 갔던 때가 생각나 이런 저런 추억을 떠올려본 것이다. 이 책은 80년대의 이른바 ‘문화열’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 11명을 인터뷰한 기록인데, 80년대를 인터뷰하는 일은 제목과 달리 자연스럽게 90년대 이후를 떠올리게 되고 또 두 시대를 비교하는 일이 되어버린다. 그들의 회고에 따르면 중국의 80년대는 새로운 이상과 낭만적 열정에 불타던 문화의 시대였다. 마치 우리의 80년대가 군부독재 타도와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찬 시대였던 것처럼.
문화대혁명엔 도리어 ‘문화’가 없었다고 생각한 대부분의 지식인들은 개혁 개방 이후 문화를 대부분 서양에서 찾으려고 하였다. 왜냐하면 중국은 ‘죽의 장막’ 속에서 서양문화와 오랫동안 단절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5·4운동 시기처럼 중국이 현대화에 뒤쳐진 이유는 중국의 전통문화에 그 원인이 있으니 하루빨리 서양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 적어도 80년대의 주류적 흐름이었다. 그러다가 “그 후 신청년 그룹은 뿔뿔이 흩어졌다. 어떤 이는 출세를 하고, 어떤 이는 물러나 숨고, 어떤 이는 전진했다. 같은 진영의 동지들마저 이러한 변화가 있을 수 있음을 나는 또다시 경험했다.”고 토로한 루쉰의 말처럼 90년대 들어서 그들은 서서히 분화되었다. 어떤 이는 장사에 뛰어들었고 어떤 이는 해외로 떠났으며, 어떤 이는 상아탑 속의 학문의 세계로 침참해 들어갔다. 우리가 처음 중국에 갈 수 있었던 90년대 초반은 바로 그런 시기였다.
그 당시 가장 유행했던 말 중에 하나가 ‘샤하이(下海)’라는 말이다.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바다에 뛰어든다는 말이지만 본래의 직업을 버리고 상업활동에 뛰어드는 것을 의미한다. 이번에는 유명한 문화인인 아무개가 ‘바다에 뛰어들었다’라거나 과연 지식인의 샤하이는 바람직한 것이냐는 논의가 무성했던 기억이 난다. 모두가 ‘바다’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지금과 비교하면 격세지감이 절로 든다. 그러나 90년대 들어 덩샤오핑의 남순강화 이후 시장경제체제 속으로 본격적으로 진입하자 이런 저런 논의가 다 무색해져 버렸다. 1994년에 벌어진 인문정신 논쟁은 경제개혁과 현대화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고자 하는 인문적 지식인의 절망적 외침이었다. 그러나 지식인들의 복벽운동이라거나 좌파적 향수를 자극하는 시대착오적인 발상으로 비춰지면서 금방 사라져버렸다. 90년대는 이미 문화의 시대가 아니었고 경제의 시대였다. 어느덧 인문적 지식인들은 사회의 저 변방의 자리로 밀려나 있었다.
냉혹한 시장의 위력 몰랐던 지식인
시장경제가 도래하기 전에는 대부분의 지식인들은 만약 전면적으로 시장화되면 모든 것이 좋아질 것이고 훨씬 많은 사람들이 독서를 하면서 문화를 향유하는 고상한 생활을 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자신들이 가장 원하는 이상(현대화, 경제개혁)이 실현되는 순간이 가장 원치 않는 사실(가치상실, 사회의 전반적 비속화)과 직면하게 되는 때임을 그 누가 알았으랴. 냉혹한 시장과 자본의 위력은 점차 두드러졌고 지식계는 급기야 1997년 신좌파와 자유주의 진영으로 크게 분화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90년대와 오늘날의 상용어는 현실, 이익, 돈, 시장, 자본주의, 정보, 유행, 대중 등임에 반해 80년대에 자주 등장했던 용어들은 격정, 반발, 낭만, 이상주의, 사회주의, 계몽, 역사, 문화, 엘리트 등이었다.
그러나 “산 끊기고 물 다하여 길 없는 줄 알았더니 버드나무 그윽하고 꽃 밝은 또 한 마을 나오더라”는 싯귀에 나오는 ‘또 다른 마을’은 정녕 찾을 수 없는 것일까. 이와 관련하여 이 책의 대담자 중의 한 사람이며 80년대의 문화열의 와중에서 서양의 다양한 고전 총서를 기획 소개하여 철저재건파 혹은 전반서화파의 한 사람으로 불렸던 간양(甘陽)의 최근 주장이 눈길을 끈다. 그는 20세기에 중국이 민족국가(nation-state)를 건립하는 일에 매진해왔다면 21세기에는 문명국가(civilization-state)를 다시금 건설하는데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중국이 개혁 개방 이후 25년 만에 세계가 놀라는 비약적 성장을 할 수 있었던 저변에는 마오 시대에 닦아 놓았던 군중과 기층을 중시했던 이른바 옌안노선과 중국전통문명의 힘이 크게 작용했다고 말한다.
여기서 연안노선이라는 것은 중앙이 모든 것을 계획해서 결정하는 소련식의 노선과 달리 중국은 일찍이 지방화의 길을 걸었으며, 중국전통문명의 힘이란 해외의 화교자본이 중국에 와서 투자하는데 고향과 인정을 중시하는 전통의 역할이 크게 작용했다는 말이다. 한 연구에 따르면 중국에서 계획경제가 가장 발전했을 때에도 중앙정부는 600종의 제품 생산과 분배를 통제했지만 소련은 5500종이었다는 것이다. 또한 미국에 사는 인도인들은 대부분 중상류층이지만 그들은 중국인과 달리 고향에 돌아가 투자하는 경우가 많지 않다는 것이다.
중국의 소프트파워 ‘사회주의 전통’
따라서 단순히 현대화를 달성하기 위해서 전통문화를 비판하거나 개혁 개방을 위해서 마오 시대의 평등을 비판할 것이 아니라 인애(仁愛)로 개괄할 수 있는 중국의 유가적 전통과, 평등과 참여로 요약할 수 있는 마오 시대의 전통, 그리고 자유와 권리를 강조하는 개혁 개방 이래의 또 다른 전통, 이 세 가지 전통을 잘 조화시켜 오늘날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천민적 자본주의를 극복하자는 것이 그의 새로운 문명국가 건설의 핵심적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사회주의적 전통이야말로 중국의 가장 중요한 소프트 파워의 하나라고 단언한다. 80년대 당시에 전통을 계승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전통에 반대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던 그였기에, 그리고 오랫동안 미국에 머물며 서양문명을 공부해온 그였기에 이런 그의 주장은 많은 관심을 끌고 있다.
지난 시절을 회고하는 책을 읽으며 찌는 무더위를 날려본다. “그대가 세간심을 떨쳐 버린다면 어느 누대의 달이 밝지 않으랴.” 아큐식 피서법?
황희경/영산대 교수·중국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