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문화 문화일반

‘강호’가 어드메뇨

등록 2006-08-24 16:15수정 2007-04-26 16:03

시안 근교에 있는 화산, 화산은 오악(五嶽) 가운데 서악(西嶽)으로 가장 높고 험준하다. 
무협지 작가들은 산을 가지고 무림 문파의 이름을 짓기 좋아했는데 아마도 이렇게 함으로써 허구적 강호세계에 약간의 시적인 정취를 더해줄 수 있었을 것이다.
시안 근교에 있는 화산, 화산은 오악(五嶽) 가운데 서악(西嶽)으로 가장 높고 험준하다. 무협지 작가들은 산을 가지고 무림 문파의 이름을 짓기 좋아했는데 아마도 이렇게 함으로써 허구적 강호세계에 약간의 시적인 정취를 더해줄 수 있었을 것이다.
“일엽편주를 타고 강호에 떴다” ‘장자’ ‘사기’에 등장한 강호는 말 그대로 대자연
점차 은자나 평민이 거한 인간세상 뜻해
세상의 불평 품은 지식인들이 협객으로 꿈 품으면서 강호는 무협지 속 상상의 공간으로 변모

변하는 중국, 변하지 않는 중국 ⑨

중국의 무협영화를 너무나 좋아한 어느 외국의 청년이 있었다. 이 청년은 무협영화에 나오는 강호가 정말 재미있는 곳이라 생각해서 언젠가 한번 가보리라 결심했다. 그리하여 중국어를 조금 배운 다음에 서둘러 중국을 찾아갔다. 그리고는 만나는 사람마다 강호는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다. 이 외국 친구는 강호를 화산(華山)이나 샤오린쓰(少林寺)와 같이 유명한 명승지로 생각했던 것이다. <소오강호>의 감독 쉬커(徐克)는 이런 질문에 답하려고 했는지는 몰라도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사람이 있는 곳에 은원(恩怨)이 있기 마련이고, 은원이 있는 곳엔 강호가 있다.” 짧게 이야기하면 사람이 있는 곳이 곧 강호라는 것이다. 정말 강호를 찾기 위해 중국까지 간 어리석은 친구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강호의 고수’에게 무술을 배우기 위해 중국을 찾는 사람은 지금도 많다.

‘동방불패’가 여자인 까닭은?

내가 자주 가는 한 중국서점이 있는데, 그 서점의 주인장도 그런 사람이다. 책을 사러 가서 우연히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가 어려서부터 무술을 좋아해서 대학도 중문과를 다녔고, 또 아주 일찍이 중국에 가서 의권(意拳)이라는 무술을 배웠으며 현재는 이런 저런 계기로 중국서점을 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는 지금도 서점을 운영하는 한편 의권 보급에 힘쓰고 있다. 그가 얼마나 ‘고수’인지는 알 수 없으나 무술에 대한 열정을 보면 아마 상당한 실력의 소유자이리라. 그한테서 들은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중국 무림계의 제2인자인 고수가 어느 날 갑자기 죽었다길래 도대체 그를 죽인 당대 최고의 고수는 누굴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사모님’에게 목이 졸려 죽었다는 것이다. 황당해서 정말 한참을 웃었다. 역시 ‘동방불패’는 여자야! 영화 소오강호 속에서 동방불패도 결국 여자가 되어 강호 최고의 고수가 되지 않았는가. 물론 여자가 되는 바람에 영호충에게 연정을 느끼게 되었고 그리하여 자신의 이름과 달리 패하게 되었지만…. 이 ‘사모님’께서는 무술에만 관심이 있었던 남편에게 정이 달아나버렸는지 모를 일이다.

각설하고 나도 ‘강호’를 무척 좋아한다. 아주 가까운 분이 나보고 강호라는 말을 자주 사용한다는 지적을 한 적이 있었는데 가만히 돌이켜 생각하니 과연 그랬다. 강호란 말을 쓰거나 들으면 왠지 나도 모르게 호방해지는 낭만적 느낌이 드는 한편으로 쓸쓸한 기분이 들기도 하는 것이 나쁘지 않았다. 왜 그럴까. 이왕 말이 나온 김에 그럼 나도 ‘강호’를 찾아 나서 볼까. 강호는 도대체 무엇이며 또 어디에 있는가.


강호라는 말이 처음 등장하는 곳은 <장자>다. “샘이 말라버린 다음 물고기가 뭍에서 서로 축축한 물기를 끼얹고, 서로 물거품으로 적셔 주는 것보다 강호에서 서로의 존재를 잊는 것이 낫다. 요임금을 성군이라고 칭송하고 걸왕을 폭군이라고 비난하는 것보다 양 쪽을 다 잊고 도와 하나가 되는 것만 못하다.” 여기서 말하는 강호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것처럼 창장(長江)과 동팅후(洞庭湖)를 가리키는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아무튼 대자연의 강과 호수를 지칭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사기>에도 강호라는 말이 나오는데,. ‘화식열전’에 보면 범려가 월나라 왕 구천을 도와 오나라를 멸망시키는데 커다란 공을 세운 후에 “일엽편주를 타고 강호에 떴다.”는 기록이 나온다. 범려가 토사구팽을 면하기 위해 물러나와 대자연 속으로 숨어들었다는 말이다. 범려는 나중에 사통팔달한 도(陶)라는 곳으로 가서 장사를 해서 큰 부자가 되었고 도주공(陶朱公)이라고 자칭하였다. 그가 ‘화식열전’에 등장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무림계의 맹주’ 진용(金庸)은 일찍이 동서고금의 인물 가운데 가장 존경하는 이가 누구냐는 질문을 받고 범려와 우칭위엔(吳淸源)이라고 대답한 적이 있었다. 한때 그는 범려를 주인공으로 하는 <월녀검>이라는 단편소설을 쓴 일이 있는데 이는 역사서에 기록된 범려와 민간에 전해오는 전설을 혼합하고 상상을 가미한 일종의 ‘팩션’이다. 사실 범려가 일엽편주를 따고 강호에 숨어들 때 미인 서시와 함께 했다는 민간 전승의 이야기는 오월 지방에 아주 오래 전부터 있어왔다.

호방하면서도 쓸쓸한 느낌

강호를 ‘오만하게 비웃다.’ 아침 해뜰 무렵 동팅후(동정호)를 바라보고 선 중국 소년.
강호를 ‘오만하게 비웃다.’ 아침 해뜰 무렵 동팅후(동정호)를 바라보고 선 중국 소년.
아무튼 강호라는 말은 이처럼 어디인지는 알 수 없지만 구체적인 강과 바다를 가리키는 말이었지만 점차 점차 외연이 확대되어 사방 천지를 지칭하게 된다. 지금도 중국어에서 ‘쩌우장후(走江湖)’라고 하면 사방 각지를 떠도는 것을 말한다. 유동성. 그리고 <장자>나 범려의 이야기에서 직감할 수 있는 것처럼 강호란 말에는 이미 은둔의 뉘앙스가 담겨 있었다. 그리하여 강호는 어느덧 조정이나 묘당(廟堂)과 상대적인 곳, 즉 은자나 일반 평민이 거하는 ‘인간세’를 지칭하게 된다. “묘당의 높은 곳에 거할 때는 백성을 걱정하고, 강호의 먼 곳에 처할 때는 임금을 걱정한다.”(범중엄) 이 점에 대해 우리는 비교적 쉽게 이해하고 있지만 같은 동양인 일본에서는 강호(일본어로 고코)라는 말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나 해서 한번 찾아보았더니 세간이나 세간의 사람들을 가리키는 중국적 표현이라고 되어 있었다. 영어로 번역하기는 참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해서 중영사전을 한번 찾아보았다. all corners of country! 시골 구석구석이라고 번역한 것이다. 재미있었다.

사실 중국을 위시한 동양의 지식인들은 심각한 내적 모순에 시달려야 했다. 이른바 입세(入世)와 출세(出世)의 모순이다. 자신의 이상을 펼치기 위해서는 조정으로 나아가야 하지만, 막상 조정의 높은 자리에 앉는 순간 ‘강호 ’의 자유로움과 한적함을 맛볼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계속 강호에 있으면? 강호에 있는데 아무도 찾아와 주는 이 없다면? 자유롭고 한적해서 좋지만 얼마 지나면 점차 적막하기 이를 데가 없는 것이다. 사실 유비처럼 삼고초려하기도 쉽지 않지만 제갈량처럼 피하기도 쉽지 않은 일이다. 잘못하면 영원한 적막 속으로 빠져 버리기 때문이다. 아무리 “옛부터 성현은 모두 적막했노라(古來聖賢皆寂寞)”라는 이백의 시구를 암송해도 고독은 견디기 어려운 것이다. 그래서 오호 통재라! 병이 없어도 신음하기도 하고, 루쉰처럼 외치기도 한 것이다. 그래도 풀리지 않는다면? 전에 <유몽영>의 “흉중의 작은 불평은 술로써 삭일 수 있으나 세상의 큰 불평은 칼이 아니면 풀 수 없다”는 구절을 소개한 일이 있지만, 마오처럼 직접 ‘칼’을 뽑은 이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지식인은 칼을 뽑을 수 있는 용기나 힘이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리하여 탄생한 것이 무협지다. 사실 무협지를 쓴 사람들은 무술의 고수가 아니라 문인이었다.

칼빼지 못한 지식인 ‘무협지’ 써

황희경/영산대 교수·중국철학
황희경/영산대 교수·중국철학
강호는 이제 문인들에 의해서 무협들이 활약하는 상상의 공간으로 변모한다. 강호라는 소설적 무대에는 지식인의 이상과 좌절, 분노와 욕망 등이 투영된다. 일반 백성은 물론이고 천고의 문인들도 모두 ‘협객의 꿈’이나 ‘강호의 꿈’을 꾸었다고 하지 않는가. 그러니까 무협지는 이른바 무협지 작가만이 쓰는 것도 아니었다. 결코 무협지 작가라고 할 수 없는 포송령이나 루쉰도 일종의 ‘무협소설’을 쓴 일이 있다. <협녀>(요지지이에 수록)와 <주검(鑄劍)>(고사신편에 수록)이 그것이다. 이 두 글은 모두 짧지만 영화화되어 호평을 받기도 하였다. 사실 유자(儒者, 지식인)와 협은 분리될 수 없다. 한비자도 “유자들은 글로써 법을 어지럽히고 협객들은 무로써 금령을 어긴다.”라고 하면서 유자와 협객을 병칭한 적이 있는데 이는 그가 양자의 연관성을 보아냈기 때문이다. 약간 다른 이야기지만 옌안에 있던 마오는 당시(1941) 소련에서 중학교에 다니던 두 아들, 안잉(岸英)과 안칭(岸靑)에게 편지와 함께 여러 ‘필독도서’를 부쳐준 적이 있는데 그 중에는 몇 권의 무협소설이 포함되어 있기도 하였다. 그가 어려서부터 <삼국지>나 <수호전>을 즐겨 읽었던 것을 상기하면 그다지 의외로운 일도 아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무협의 문화는 중국의 역사나 문화와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 듣자하니 현재 중국에서는 무협지는 물론이고 무협영화, 무협 연속극, 무협 음악, 무협만화, 무협 인터넷게임, 무술학교, 무협여행 등 이른바 ‘무협경제’가 활황이라고 한다. 특히 2001년에 창간된 <금고전기(今古傳奇)ㆍ무협판>라는 무협관련 잡지가 있는데 발행량이 무려 70만부에 달한다고 한다. 이렇게 중국에서 ‘무협경제’가 발달하는 것은 시장화가 심화되면서 ‘강호’가 점차 냉혹하게 변질되고 있으며, 또한 도처에서 ‘강호’의 질서를 어지럽히고 다니는 ‘서방불패’라는 ‘괴물’ 때문은 아닐까.

황희경/영산대 교수·중국철학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문화 많이 보는 기사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1.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2.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3.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4.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5.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