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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세설] 유통기한 지난 386/유재현

등록 2006-11-09 18:47수정 2006-11-09 19:10

4·19에서 386까지 시대정신은 그 시대에만 유효
90년 이후 우리사회는 80년대 유령에 농락당해
빛바랜 그들에 기댄 무이념의 시대정치 이대로라면 개혁은 언감생심뿐
한 시대를 살아갔던 사람들에게는 마치 상흔처럼 그 시대의 역사와 정신이 각인되어 있다. ‘세대’는 그렇게 시대의 기록으로 남는다. 4.19에서 386에 이르기까지의 세대를 우회하는 방법으로 우리 현대사를 조명할 수 있다면 그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세대는 왜 자신들을 등장시켰던 시대정신을 이윽고 또는 재빨리 배반하거나 외면한 후 역사의 뒤편으로 추레하게 사라지는 것일까. 4.19와 6.3에서 유신과 긴조, 386에 이르기까지를 예외 없이 관통하는 변절과 타락의 역사는 그런 물음을 던지게 하는데 아마도 386에 이르러 우리는 좀 더 선명하게 그 장면을 목도하고 있는 중이다.

이전의 세대와 달리 386세대는 최초로 권력의 전면에 등장한 세대로 기록되었다. 386세대는 노무현정권을 탄생시켰고 그 대표주자들은 줄을 이어 권력의 핵심부와 주변부에 도달할 수 있었다. 386은 노무현정권의 정치적 기반으로 각인되었고 지지율이 10퍼센트 안팎을 헤매게 된 지금에 이르기까지 노무현은 그 인식에서 한 번도 자유롭지도, 자유롭고자 하지 않았다. 최근 노사모와의 청와대오찬에서의 노무현의 발언은 그 극치를 보여준다. “내가 대통령하는 동안 386은 박해받고 있다.”는 인식은 그를 대통령의 반열에 올려주는 데에 한 몫을 했던 ‘안티조선’의 저열한 의식에서 여전히 그가 헤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386에 대한 그의 무한한 애정과 예찬은 노무현 정권에게 386세대가 맹신의 경지에까지 도달해 있다는 의구심을 갖게 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청와대에서 온갖 정부기관장에 이르기까지 386은 노무현의 낙하산부대로서 그 어떤 세대와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우대받아 왔다. 그런 386을 핍박하는 주범으로 지치지도 않고 끝임 없이 보수언론을 들먹이지만 노무현 자신의 표현을 빈다면 바로 그 적대적인 미디어들의 따발총 세례에도 그는 대통령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하물며 권력을 손에 넣은 후에도 자신과 지지자들이 박해받고 있다는 해괴한 피해망상을 토로하는 데에 지금까지도 열중하고 있는 모습은 측은함을 넘어 애처롭기까지 하다.

노무현의 애처로운 책임회피와는 무관하게 이른바 참여정부는 오래전에 파산의 종착역을 향해 줄달음치고 있다. 개혁은 초기에 실종되었고 남은 것은 별 가치 없는 아집과 궤변뿐이다. 더불어 386이라 이름 붙여진 한 세대의 전성기 또한 초라하게 막을 내리고 있다. 그들은 이전의 세대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을 등장시켰던 시대의 정신을 발전적으로 실현하는 대신 배반하고 타락시켰다. 남은 것은 지독히도 환멸스러운 시대정신의 파산이었다.

386은 어떤 세대인가. 노무현의 말을 빈다면 그들은 “한국의 역사가 열린 이래로 한 세대가 그렇게 집단적으로, 평균적으로 도덕적 이상에 불타올랐던 시대가 없었고, 젊은 사람들이 그렇게 헌신적으로 자기 몸을 던져가며 싸웠던 시대”를 상징하는 세대로 표현된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내가 기억하는 한 그 시대를 헤쳐 나갔던 젊은이들은 집단적으로 도덕적으로 헌신적으로 싸웠다. 그건 그 시대의 정신이었으며 그 시대에는 누구도 그 정신에서 평균적으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90년대 이후 386의 후광을 짊어진 정치적 대표주자들은 헌신적으로 싸우는 대신 ‘현실정치’의 늪 속에 침몰했고 개혁은 유령선에 올랐다. 386이란 낙하산을 바라보고 청와대를 향해 목을 길게 빼는 무질서한 군집을 상징하며 2006년 11월에도 여전히 ‘박해받는 386을 중심으로 어게인2002’를 읊조리는 시대착오의 주인을 섬기는 레밍의 떼들로 여겨진다.

386에 이르러 우리는 다시금 교훈을 얻을 수 있는데 그것은 세대란 단지 기록될 뿐이며 오직 그 시대에만 존재한다는 것이다. 4.19세대는 4.19의 그 시대에만 존재하는 것이며 386세대란 80년대 그 시대에만 존재한다. 그 시대를 벗어난 세대는 다만 유령일 뿐이다. 돌이켜보면 90년대 이후 우리 사회는 그렇게 386이란 실체 없는 80년대의 유령에 농락당해왔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386에 느끼는 환멸은 사실은 원인무효일지도 모른다. 80년대에 시대정신에 충실했던 일군의 사람들이 2000년대에 변절할 수 있고 타락할 수 있다. 그 변절과 타락이 아름다운 것은 아니겠지만 그들을 80년대의 시대정신으로 돌아가 비난할 수 있다면 그건 세대가 아니라 한 인간에 대해서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엄혹하게 비난해야 하는 것은 386이 아니라 이념과 노선, 신념과 정책을 386의 빛바랜 허상으로 대신하고 도덕불감증의 떼거리에 의존하고 있는 무이념의 세대정치인 것이다.

유재현/소설가
유재현/소설가
현실 정치에서 세대란 좀처럼 무엇도 의미하지 않는다. 함의를 갖고 있다면 그것은 지난 한 시대를 빛냈던 정신으로서 지금도 남아있는, 시대를 관통하는 가치로서 진보를 향한 헌신과 열의, 도덕적 이상과 같은 것들일 뿐이다. 그러나 현실의 정치에서 절실하게 중요한 것은 정치적 지향성을 분명히 하고 정치세력의 성격을 명확히 하며 정치적 실천에 있어 흔들리지 않음을 담보하는 이념정치의 실현이다. 세대정치의 해악은 이념을 과거의 시대정신으로 대치하고 인적자원으로서의 세대를 그 허상의 이념과 동일시한다는 것이다. 노무현정권의 무이념 세대정치는 해방 이후 보수정치를 지배했던 저열한 떼거리정치의 연속선상에 놓여 있으며 따라서 우리 정치는 다만 정치꾼들이 바뀌었을 뿐 여전히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 이런 정치라면 개혁은 언제라도 언감생심일 뿐이다. 미래의 언제라도.

유재현/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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