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에 갈 때마다 이곳저곳 한참씩 거닌다. 동네 골목골목, 개울가며 앞산뒷산 골짜기…. 유년의 공간에 들어서면, 몸 속 유년의 시간도 문득 깨어난다. 계절과 시간과 기후에 따라 수백수천의 섬세한 빛깔로 물들던 하늘, 저마다 다른 종류의 풀과 나무를 전념하여 기르던 땅. 그 사이를 오가며 느꼈던 유년의 감각이 현재형으로 살아난다.
산길로 강둑으로 느릿느릿 하염없이 걷는 고모를 이해할 수 없고, 참다못해 그만 집에 가자고 결국 조르게 되면서도, 시골 조카가 늘 나를 따라나서는 것은 외로움 때문이리라. 오래 전 마을길에 그 흔했던 아이들은 다 어디로 가고, 조카는 같이 놀 또래 친구가 없다. 그나마 몇 안 되는 초등학생들을, 읍내에서 들어온 학원버스가 실어 가버린다.
사라진 것은 아이들뿐만이 아니다. 산과 연못과 골짜기가 개발되면서, 거기 깃들어 있던 존재들도 사라졌다. 내 유년의 강에는 이무기가 웅크리고 있었고 애장터에서 불어온 바람결에 아기 울음소리가 묻어났다. 신라 때 도깨비 대장인 비형랑의 구역이어서 그런지 도깨비에 홀려 산길 가시밭길을 밤새 헤맨 이들이 있었고, 어느 해 겨울에는 처녀귀신이 사는 골짜기에서 얼어 죽은 남정네도 있었다. 그 중에서도 신비로운 것은 연못 속의 옛 절이어서, 새벽이나 깊은 밤이면 천년 전 종소리가 간혹 내 귀에도 아득히 들려오곤 하였다.
그러나 산과 들이 온통 파헤쳐진 ‘개발’의 시대를 사는 조카의 시공간에는 어떤 전설이 숨쉬고 있을까? 오래 전 내가 다녔고, 지금은 조카가 다니는 초등학교에 들렀다가 우연히 알게 되었다. 큰 나무들이 모여 서있는 학교 뒷담께로 가길 한사코 꺼려하며, 조카는 자꾸만 내 옷깃을 잡아 당겼다. 알고 보니 그 자리에서 즐겨 놀던 아이 하나가, 시골길을 마구잡이로 달리던 공사트럭에 치여 죽었단다. 그런데 죽은 후에도 그 자리에 나타나 있곤 하는 아이를 본 사람이 한둘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게, 옛 전설이 사라져가는 공간에서, 아이들은 당대의 전설을 만들며 유년을 건너고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더 흐르면, 발전과 개발의 와중에 사라진 것들을 기억하는 이조차 없어지겠지.
언어 권력을 가진 이들이 말로써 온갖 휘황한 장난을 치는 세상을 살며, 나는 자기 언어를 갖지 못한 것들에 대해 생각한다. 죽었으나 차마 떠날 수 없었던 아이와, 허물어진 산과 계곡과, 거기 깃들어 있던 생명과 생명 아닌 존재들을….
선안나/동화 작가 sun@iicl.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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