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네카는 “세상의 이치에 따라 살아야 행복해질 수 있다”고 설파했지만, 정작 그의 저서 <행복한 삶에 관하여>의 상당 부분을 자신을 향한 비난에 대해 변명하는 데 할애했다. 네로 황제의 명에 따라 세네카가 핏줄이 잘린 발을 대야에 담근채 죽어가고 있는 장면을 그린 다비드의 <세네카의 죽음>.
김용석의 고전으로 철학하기 / 세네카의 <행복한 삶에 관하여>
루키우스 안나이우스 세네카는 로마 제국 초기의 사상가이다. 그는 소년 네로의 개인 교수였고 네로 황제가 선정을 베풀던 통치 초기에 정치적 조언자였으나, 네로가 폭군으로 변해가면서 그로부터 멀어졌고 결국 황제의 명에 의해 자살로 생애를 마감했다.
세네카는 로마 제국 시대의 사상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스토아 철학의 영향을 주로 받았지만, 그에 머물지 않고 고대 그리스 사상의 다양한 갈래들을 종합하여 나름의 철학을 이루어냈다. 그가 공인으로서 경력의 정점에 있었던 58년에 쓴 <행복한 삶에 관하여>에도 이런 사상적 특성이 담겨 있다.
세네카의 행복론에는 물론 사람이라면 누구나 바라는 ‘행복으로 가는 길’에 대한 철학이 담겨 있다. 그는 자연의 이치를 깨닫는 일의 소중함을 역설하고, 진정한 행복을 얻으려면 “미덕을 앞장세우고 쾌락은 쫓아오게 하라”고 가르친다. 세네카는 순간의 쾌락이 주는 행복감이 아니라, 삶의 지속적인 행복과 그에 따라오는 보람과 기쁨에 대해 논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가르침은 책의 제15장에서 절정에 이른다.
그래서 세네카 사상의 연구가들은 그가 15장에서 글을 맺었어야 한다고 비평하기도 한다. 총 28장이 전해오는 이 작품의 17장부터(16장은 15장에 대한 보충 설명이다) 마지막 장까지는 현실에서 세네카의 삶을 비난하는 사람들에 대한 ‘변명’인데, 그것이 궁색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왜 그의 말과 행동이 다른지, 절제의 미덕을 가르치는 그가 어떻게 해외에까지 많은 재산이 있을 정도로 엄청난 부를 축적했는지, 그의 일상적 삶은 왜 그리도 호사스러운지 등의 비난에 대해서 다양한 이유를 들어서 변론하고 있다.
그러나 관점을 바꾸어서 보면 이 책을 흥미롭게 읽는 열쇠는 오히려 17장 이후의 부분이라고 할 수도 있다. 세네카는, 세상 만물의 이치를 깨닫고 그에 따르는 것이 그래도 불완전한 인간이 자유를 얻는 길이며 이에 궁극적으로 행복이 따라온다고 가르친다. “우주의 법칙에 따라 참아야 하는 것은 의연하게 참아야” 하며, “인간의 힘으로는 회피할 수 없는 일들 때문에 당황하지 않고” 초연함으로써 자유로운 것이며 이에 행복이 따라온다는 것이다.
그런데 세네카는 세상의 이치를 깨닫고 그에 따름으로써 자유로울 수 있었는지 모르지만, 타인의 비판으로부터 자유롭지는 못했다. 다른 사람들이 그의 명성을 헐뜯고, 그가 모은 재산의 정당성에 대해 의혹을 품으며, 그의 말에 귀기울이지 않았을 때, 그는 고뇌했던 것이다. 행복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안타까울 정도로 반복되는 긴 글 속에서 자기 변명을 늘어놓았던 것이다.
세네카의 이런 태도는 우리에게 두 가지 생각거리를 제시한다. 우선 세네카는 ‘합리적 변명’을 하고 있지만(그것이 나름의 체계 안에서는 논리 정연한 것처럼 보인다는 점에서), 그 변명이 자신이 설파한 “세상의 이치에 따라서 살아야 하고, 의연하게 참아야 한다”는 원칙에 모순된다는 것이다(그는 탁월한 ‘행복론’에 부록처럼 덧붙여 놓은 궁색한 변명들로 명작을 손상할 게 아니라, 의연하게 참았어야 했으리라).
이 보다 더 중요한 생각거리는, 궁극적으로 행복은 인간 관계의 차원에서 얻어진다는 사실이다. 내가 세상의 깊은 도리를 깨닫고 성실하게 노력해서 행복해졌다고 할지라도, 다른 사람들이 행복하지 않을 때, 결국 나 자신도 행복하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자신의 삶을 전범으로 삼아 행복을 가르치는 사람에게 고뇌의 한숨이 따르고 불행의 그림자가 드리우는 이유는, 그가 자신의 가르침처럼 그렇게 행복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 아니다. 수많은 타인들의 불행이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고전을 읽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고전이 전하는 교훈과 명언을 곰곰이 새기며 읽을 수도 있고, 고전의 모순과 결함을 짚어가며 읽을 수도 있다. 이는 남을 가르치려는 의도로 쓰여진 사상 고전일 경우 더욱 유용한 독서 방법이다. 흔히 고전은 ‘마르지 않는 샘’이라고 한다. 샘을 마르지 않게 하는 것은, 고전 그 자체가 아니다. 새로이 고전을 읽는 세대마다 물을 긷는 방식과 두레박의 크기인 것이다. 그때마다 길어 올리는 샘물의 질과 양 또한 달라지기 때문이다. 영산대 교수 anemos@ysu.ac.kr
이 보다 더 중요한 생각거리는, 궁극적으로 행복은 인간 관계의 차원에서 얻어진다는 사실이다. 내가 세상의 깊은 도리를 깨닫고 성실하게 노력해서 행복해졌다고 할지라도, 다른 사람들이 행복하지 않을 때, 결국 나 자신도 행복하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자신의 삶을 전범으로 삼아 행복을 가르치는 사람에게 고뇌의 한숨이 따르고 불행의 그림자가 드리우는 이유는, 그가 자신의 가르침처럼 그렇게 행복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 아니다. 수많은 타인들의 불행이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고전을 읽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고전이 전하는 교훈과 명언을 곰곰이 새기며 읽을 수도 있고, 고전의 모순과 결함을 짚어가며 읽을 수도 있다. 이는 남을 가르치려는 의도로 쓰여진 사상 고전일 경우 더욱 유용한 독서 방법이다. 흔히 고전은 ‘마르지 않는 샘’이라고 한다. 샘을 마르지 않게 하는 것은, 고전 그 자체가 아니다. 새로이 고전을 읽는 세대마다 물을 긷는 방식과 두레박의 크기인 것이다. 그때마다 길어 올리는 샘물의 질과 양 또한 달라지기 때문이다. 영산대 교수 anemos@ysu.ac.kr
관련기사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