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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교육

딸아… 우리, 꽃보며 살자

등록 2006-04-16 13:10수정 2006-04-17 18:11

아낌없이 주는 나무

은아, 오늘은 우리 눈이 모처럼 호사를 하였지? 하루 종일 꽃을 보고 꽃을 따고 꽃을 먹기까지 하였으니 말이야. 고속버스를 타고 오는데도 눈앞에 꽃잎이 어른거리고, 집에 도착해서도 천정에 꽃가지가 일렁이네. 외갓집 가자는 말에 네가 반색하며 따라 나선 것은 학교 울타리를 잠시라도 벗어나고 싶어서였겠지만, 어쨌든 현장체험학습 제도는 참 바람직하다.

시골에 도착한 다음날 팥밥 짓고 미역국 끓여서 외할머니 생신 상을 차리길 참 잘했지? 생일 아침에 혼자 밥을 짓자면 얼마나 쓸쓸하시겠니. 그런데 우리가 케이크에 촛불 켜고 노래 불러드리니까 아주 환하게 웃으시잖아.

외할아버지 산소에 장미 묘목을 심은 뒤, 산등성이에 지천으로 핀 진달래꽃을 땄어. 소월 시에 곡을 붙인 마야의 ‘진달래꽃’을 함께 부르며, 난만한 꽃가지 사이에서 사진도 찍었지. 집에 돌아와서는 화전을 부쳤어. 외할머니가 쌀가루 반죽을 떼어 놓으면 내가 미나리나 국화잎을 얹고, 네가 진달래꽃을 보기 좋게 놓았지. 그때 나는 잠시 상상했단다. 내가 할머니가 되고, 네가 엄마가 되어, 너의 아이들과 함께 화전을 부치는 광경을….

오후에도 우린 꽃구경을 하였지. 벚꽃 구름이 하늘을 가린 꽃 터널을, 사랑하는 엄마와 딸과 걸으며 난 많이 행복했단다. 그곳에 모인 사람들 얼굴을 너도 눈여겨 보았니? 거칠고 그을린 피부에, 오랜 노동으로 휘어지고 구부러진 몸이 대부분이었지만, 하나같이 흥겨운 표정이었지. 누군가 인위적으로 조성한 ‘축제’의 구경꾼 역할이 아니라, 꽃철에는 자기 삶의 주인으로서 기꺼이 일손을 놓고 꽃을 보고 먹고 마시고 떠들며 ‘잔치’를 즐기는 사람들. 우리가 잃어가고 있고, 되찾고 지켜야 할 삶이 바로 그런 것이겠지. 자기가 자기 일상의 주인이 되고, 주체가 되는 삶.

은아, 저번에 외갓집에 들렀던 백무산 시인 아저씨 기억하지? 너와 꽃을 보며, 나는 아저씨의 시 가운데 ‘비가 내려 넝쿨장미 붉은 꽃 흙 범벅이 되어도/ 바가지 물 떠다 꽃잎 씻던’ 동무 얘기를 떠올렸단다. 네가, 우리가, 삶을 사는 마음도 이러하기를 간절히 바랐지. 생활은 늘 먼지와 흙탕물이기 일쑤이지만, 지치지 않고 끝내 꽃잎을 씻는 마음이기를…. 딸아, 우리 그렇게 꽃 보며 살자. 꽃처럼 살자.

선안나/동화 작가 sun@iicl.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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