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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조된 이상 도시

등록 2008-10-29 17:13

급조된 이상 도시
급조된 이상 도시
[매거진 esc] 오기사의 도시와 건축
서울의 지도를 보며, 또는 강남의 길을 걸으며 오랫동안 궁금했던 일이 있다. 이 강남의 블록은 왜 이렇게 큰 것일까? 블록 내부의 좁은 골목들은 어떤 규칙으로 조성됐을까? 계획도시라고 하는데 누가 언제 무슨 근거로 이런 커다란 땅덩어리를 제안했을까?

19세기 이후 개발된 많은 도시들은 격자형 도로망을 갖고 있다. 물론 격자형 도로는 고대 도시에서도 볼 수 있다. 하지만 근대 이후의 도시들은 이전보다 훨씬 광범위한 면적과 이에 따르는 계획성을 갖고 있다. 뉴욕과 바르셀로나가 그 대표적인 장소다. 그런데 뉴욕 한 블록의 크기는 대략 가로 길이 250미터에 세로 길이 70미터 정도고, 바르셀로나의 격자는 한 변이 100미터 정도 되는 정사각형 형태다. 강남구 한 블록의 크기는 대략 600미터 전후다. 전세계에 유례가 없는 거대한 블록인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 집에 집들이를 다녀오며 궁금증이 조금 풀렸다. 그가 사는 곳은 강남 개포 주공 1단지. 5층짜리 옛 아파트들이 모여 있는 단지의 입구에서 낡은 단지 안내판을 보았다. 미로 같은 단지 안에서 목적지를 찾으며 ‘혹시 이것?’ 하는 생각이 들었다. 1924년 미국의 도시계획가 클래런스 아서 페리가 주창한 ‘근린주구(近隣住區) 이론’이 바로 그것이다. 페리에 따르면 이상적인 도시는 초등학교 하나를 공유하는 이웃들이 모여 사는 단지를 기초로 한다. 또 단지 안에서 차와 사람의 동선이 구분되어야 하고, 학교와 공공시설은 단지 중심에 자리잡아야 한다. 초등학교 하나를 공유할 만한 적정 거주 인구는 대략 5000~6000명,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걸어갈 수 있도록 규모는 반지름 400미터 정도여야 한단다.

그런데 그것은 미국적 삶의 이야기였다. 우리의 콩나물시루 같은 교육환경을 생각한다면 초등학교 하나를 공유할 만한 적정 거주 인구는 두세 배로 늘어나야만 한다. 물론 당시에도 5층 아파트를 세울 기술은 있었으니 땅의 면적은 조금 줄어도 되었을 것이다. 미국 도시계획이론 기반 아래 한국적 상황을 적용해 강남의 거대 블록들이 탄생한 것이다. 70년대 서울시 도시계획국장이었고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를 쓴 손정목에 따르면, 강남 개발은 당시 권력의 정치자금 마련을 위한 급조된 도시계획이었다. 고민할 틈도 없이 도시계획가들은 권력의 속도에 발맞춰야 했고, 하나의 서양 이론을 끌어다가 둔탁한 강남의 블록들을 그렸을 것이다. 이후 주택공사가 주도했던 주택단지 개발 역시 블록의 크기에 걸맞도록 100여개의 아파트 동이 몰려 있는 하나의 거대 단지로 조성됐다.

이제 잠실 주공 아파트 단지들의 재건축이 거의 끝나간다. 개포 주공 1단지도 그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 30년 정도 된 주공 아파트 단지들은 그 자체로도 격동의 시절을 대변한다. 형상과 배치가 몇 년 후면 깨끗이 사라질 운명이다. 치열했던 역사의 현장 속에서 이상적인 주거 단지를 한국적 상황에서 실현하고자 했던 대상들이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에 애증 섞인 애도를 표한다.

오영욱/건축가·오기사디자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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