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길을 오르고 내리는 일은 자연과 일치하고 신성을 깨닫는 경험
미래가 아니라 과거를 마주하는 섬세한 여정 겨울산행에 들뜬 내게 산은 늘 새로운 길
미래가 아니라 과거를 마주하는 섬세한 여정 겨울산행에 들뜬 내게 산은 늘 새로운 길
산에서는 가을이 겨울과 같다. 늦가을에 눈이라도 조금 내려 산꼭대기에 쌓인 것이 보일라치면 산에 오르는 이들은 겨울의 복판에 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가을 산은 이미 겨울을 맞고 있다. 요사이 동네 뒷산의 오솔길에는 낙엽이 쌓여 걷는 이들을 즐겁게 한다. 낙엽 진 나무와 나무 사이로 나 있는 침묵하는 길은 여름보다 훨씬 훤하다. 멀리 있는 풍경이 눈앞에 바투 있는 것 같다. 이맘때가 되면 산은 정갈하기 이를 데 없다. 소리 내는 많은 것들이 제 모습을 감춘다. 계곡에 흐르는 물도 겨울에는 얼음 속으로 모습을 감출 것이다.
산행은 늘 어떤 삶에의 초대와 같다. 그곳에는 눈을 감고 보아야 하는 희망도 있고 우리를 절망하게 하는 아름다움도 있다. 그런 면에서 산행은 하나의 모험이기도 하다. 산에 가지 못하고 집에 있으면 내 관심은 두 개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집 안에 갇혀 지내는 자신에 대한 관심과 관찰 같은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갇혀 살면서 바깥을 바라보는 태도와 시선이다. 안정감과 조화로움을 지닌 산에 오르는 것을 좋아하는 내게 있어서 집 안에 갇혀 산다는 것은 큰 결핍이다. 그럴 때 나는 갇혀 있으면서 바깥의 산을 바라보게 된다. 산을 향한 태도와 시선은 이때 태어난다. 그 가운데 가장 큰 태도와 시선은 산에 관한 책을 읽으면서 빛난다.
산에 관한 책 가운데, 내가 곁에 놓고 자주 읽는 책은 영국의 산악인인 프랑크 스마이더(1900-1949)가 쓴 <산의 환상>이다. 이 책은 산행에 관한 것이되, 길 안내가 아니라 자연을 사색하고 명상하는 이의 독백이다. 이 책을 읽으면 내 안에 하나의 산이 자리잡는다. 이제는 자주 읽어 외우고 있는 구절도 있다. 가령, 이런 글귀는 절창이다. “산은 소박한 사람들을 위해서 창조되었다. 산을 오르고, 이성과 육체가 완벽하게 일치하고 조화를 이루며 일하는 것을 느끼고, 아름다움을 본다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다. 그곳에는 발견해야 할 건강이 있고, 철학과 평화로운 이성과, 고요한 영혼도 있다. 등산에는 추적이나, 피에 대한 굶주림이나, 고통에 뿌리를 박지 않고, 그보다는 인간과 자연 사이에 개별적이고 밀접한 무엇에, 그리고 자연을 통해 신에게 뿌리를 박은 그런 목적의 힘이 존재한다.” 이 글을 주문처럼 반복해서 읽으면, 산행은 삶의 결정체처럼 여겨진다. 산길을 걸어 오르고 내리는 일이 자연과 일치하고 신성을 깨닫는 경험임을 알게 된다. 그리고 이런 글귀는 새롭다. “산에서 어떤 다른 시간보다도 더 아름다운 시간을 꼽는다면 그것은 해가 지는 시간이다. 이 시간은 정신적인 아름다움과 평화와 이해의 시간이다.(…)그대는 아름다움을, 산과 꿈꾸는 바다의 아름다움을, 밤새도록 살아 있을 빛의 아름다움을 볼 것이며, 고요한 황무지 너머 더욱 고요한 바다의 침묵을 건너다보며 그대는 모든 창조의 영혼으로부터 유래하는 평화를 알게 될 것이다.” 정말 그렇다. 산에서 야영을 하게 되면 산과 하늘이 구별되는 하늘금이 순간 사라질 때를 보게 된다. 이 순간 우리들 자신은 자연 속에 물들어 간다. 추위와 침묵과 산의 높이가 하나가 된다.
겨울이 되면 산에서 암벽등반을 하는 것이 힘들다. 바위가 차갑게 얼어붙기 때문이다. 젊은 시절 나는 산꼭대기에 눈을 두고 산에 올랐다. 이제는 산의 풍경을 형성하는 모든 것에 시선이 간다. 지금은 산에서 야영하는 것이 힘들어졌지만, 암벽등반과 더불어 야영은 내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것들은 스스로에게 위험을 강요하는 모험이기도 하다. 그러나 암벽등반은 사람들이 상상하듯 그렇게 가혹한 것은 아니다. 암벽등반은 본질적으로 통제되고, 질서정연한 몸 전체의 움직임으로 오르는 평화스러운 모험이다. 바위를 수직으로 오르는 춤이다. 스마이더는 암벽등반을 하면서 “어느 언덕에서 햇빛을 받으며 산들이 침묵으로 노래하는 소리를 듣기 위해 귀를 기울여도 좋은 그런 순간들이 찾아오”는 순간을 가장 큰 기쁨으로 여겼다. 암벽등반은 매우 탐미적 행위이다.
돌이켜 생각하면, 산행은 내 삶의 미래가 아니라 과거를 마주하는 섬세한 여정이었다. 산을 오르며 되새겨 본 과거는 그 어떤 것도 경멸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그런 탓일까, 스마이더의 이런 글귀를 읽다보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책을 잠시 덮고 깊은 생각에 빠진다. “산들을 오른다는 것은 과거를 정면에서 오르는 것과 같다. 황량한 능선들을 향한 바위산들은 우리들이 아끼고 존중하는 모든 것의 탄생과 성장”을 지켜 보아왔기 때문이다. 곧이어 산에 눈이 내릴 것이다. 불의 기운을 가진 바위와 나무 그리고 계곡이 온통 눈을 이불처럼 덮고 있을 것이다. 겨울눈은 산을 더 단순하고, 더 아름답게 만들 것이다. 그렇다. 이제 큰 배낭과 겨울 장비를 손보는 때가 되었다. 마지막으로 겨울 산행에 들뜬 내게 그가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등산이란 정성을 다 바쳐서 해야 하는 것이지, 인간과 산이 벌이는 전쟁은 절대로 아니야”라고. 나는 그의 말을 받아 이렇게 쓴다. 산에서의 발걸음은 늘 새로운 길이라고.
안치운/호서대 교수·연극학과, 연극평론가
안치운/호서대 교수·연극학과, 연극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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