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사르의 〈갈리아 전기〉에서 전쟁의 성패는 합리성과 고도의 문명적 성과물의 활용에 달려 있는 것으로 그려진다. 훗날 발굴 결과 밝혀진 알레시아 전투 당시 로마군의 진지. 〈갈리아 전기〉(범우사)에 실린 삽화
김용석의 고전으로 철학하기/카이사르의 <갈리아 전기>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기원 전 58년부터 51년까지 8년 동안 로마 군단을 이끌고 갈리아(지금의 프랑스)와 브리타니아(지금의 영국) 정복 전쟁을 벌인다. 그는 전쟁 기간 동안 당시 전황을 비롯해 적지의 사정, 아군의 전투 준비, 적과의 협상 내용 등을 꼼꼼히 기록하는데, 그 결과물이 전쟁 문학의 고전이라는 〈갈리아 전기〉이다. 좀 도발적으로 말하면 전쟁은 매혹적이다. 전쟁 이야기만큼 흥미진진한 것도 없지 않은가. 하지만 〈갈리아 전기〉는 무척 건조한 작품이다. 그 안에는 ‘삼국지’ 같은 작품에 나오는 매력적인 영웅들이 없다. 일기당천의 무용담도 없다. 단 번에 적을 섬멸하는 신출귀몰한 전략과 전술도 없다. 전투 장면을 기록하는 데서도 카이사르는 극적인 묘사를 철저히 배제하고 있어서 글의 전개에서 맥이 빠지는 듯한 느낌을 주기까지 한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로마 군은 많은 적을 살해했으나, 후퇴하는 적을 너무 열심히 쫓아가는 바람에 약간 명의 아군을 잃었다.” 하지만 〈갈리아 전기〉에는 ‘전쟁의 적나라한 사실들’이 있다. 모든 기록이 그렇듯이 카이사르도 자신의 관점에서 기록했다는 점에서 완전히 객관적일 수는 없지만, 전쟁에 관한 세세한 사실들이 꼼꼼히 기록되어 있다. 무엇보다도 〈갈리아 전기〉의 가치는, 전쟁 수행이 철저하게 이성적인 것이며 전쟁에는 높은 수준의 문명적 성과가 이용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는 데에 있다. ‘갈리아 전기’는 전쟁이 그 시대 최고 문명의 산물로 가득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지만 살육과 파괴에 봉사하는 부조리한 것임도 지적한다. 전쟁 준비에서부터 전투를 벌이는 방식 및 적장과 담판을 하는 데에 이르기까지 카이사르는 세세하게 각종 ‘이치’를 따지고 든다. 우선 전쟁 상대인 각 부족들에 대한 지식을 수집하는 데 소홀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카이사르는 “브리타니 인과 전쟁을 하기에는 시기적으로 너무 늦었지만(겨울이 곧 다가오므로), 섬에 들어가 그 인종의 특성을 살피고 섬의 위치와 항구, 상륙 지점을 알 수 있다면 훨씬 유리하리라 생각해서” 곧 실행에 옮긴다. 전투에서도 그는 “병사들의 왕성한 사기는 극구 칭찬했지만, 전투의 과정과 진전 결과에 대해 지휘관보다 더 잘 알고 있는 듯이 생각한 방종과 오만은 혹독하게 질책했다”고 적고 있다. 또한 아군이 적군에게 밀렸을 때도 “지형의 불리함으로 인한 일을 적의 무용 탓으로 돌려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카이사르는 전쟁은 본질적으로 지식과 합리성의 산물이라고 인식하는 것이다. 그래서 갈리아 연합군의 사령관 베르킨게토릭스도 “로마군은 무용과 전투대형에 의하지 않고 갈리 인이 전혀 모르는 공격 기술과 지식으로 전쟁에서 이겼다”고 인정한다.
그리고 카이사르에게 각종 공사와 군수 물자 관리는 전쟁에서 핵심적인 것이다. 그가 레누스강(지금의 라인강)에 다리를 놓아 도하 작전을 편 것은 유명하다. 다리를 놓기에는 강의 넓이와 깊이, 강물의 속도에서 큰 어려움이 있었지만, 목재가 운반되기 시작한 날로부터 10일만에 공사를 완료하고 대부대를 이동시켰다. 로마 군단의 갈리아 원정기는 그 자체가 끊임없는 토목 공사와 각종 대형 기구 제작의 연속이었다. “늘 해왔던 것처럼 카이사르는 공사를 감독하고 공사가 늦어지지 않도록 병사들을 격려했으며”, 공격 준비를 위해서 가교를 만들고 보루를 세우고 귀갑차를 제작하고 탑을 건설했다. 이런 제작물들은, 건설과 기구 제작에 관한 한 역사상 획기적인 장을 열었던 당시 로마에서 개발한 고도의 기술을 적용해 만든 것이다. 다시 말해, 문명적 산물인 것이다.
김용석/영산대 교수
anemos@ys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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