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선 대학에서 중의학과 양의학 기본원리를 모두 가르침으로써 서로에 대한 몰이해와 편견을 극복하고 있다. 근대중국의 문호 루쉰은 중의학에 대해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 사기꾼”이라고 단언할 정도로 부정적이었다. 루쉰만이 아니라 근대 중국의 대다수 엘리트들도 그랬다. 하지만 “중의 때문에 중국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인구를 가지게 되었다!”는 중의 옹호론도 많다. <한겨레> 자료사진
‘정조 지킨 귀뚜라미 한쌍’ ‘3년 서리맞은 사탕수수’
구할 수 없는 약만 처방하는 ‘중의’를 비꼰 루쉰처럼
당대 지식인들은 양의를 환대하고 중의를 멸시했다
구할 수 없는 약만 처방하는 ‘중의’를 비꼰 루쉰처럼
당대 지식인들은 양의를 환대하고 중의를 멸시했다
변하는 중국, 변하지 않는 중국 ⑩
어느 황제가 재위하고 있을 때 많은 궁녀들이 병을 앓고 있었다. 그들은 아무리 좋은 약을 먹어도 별로 효험을 보지 못하였다. 나중에 한 명의가 와서 처방전을 써주었는데 거기에는 “장정 약간 명”이라고 써 있었다. 황제는 어쩔 수 없이 그 의사의 말대로 하였다. 며칠이 지나 친히 가서 살펴보니 궁녀들의 얼굴엔 과연 화색이 가득 돌고 있었다. 그런데 한 쪽 구석에 비쩍 말라 거의 사람같지 않은 남자들이 땅바닥에 엎드려 있었다. 황제가 깜짝 놀라 “저것이 무엇이냐”고 물으니, 궁녀들은 머무적거리다가 “약찌꺼기옵나이다”라고 대답하였다.
<신약(新藥)>(1933)이라는 루쉰의 글에 나오는 이야기다. 원래 청대 저인획이라는 사람이 편찬한 <견호집>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루쉰이 당시 여러 사람으로부터의 비판에 직면해 ‘약찌꺼기’ 신세로 전락한 국민당의 원로 우즈후이(吳稚暉)라는 사람을 비판하기 위해 따온 것이다. 헌데 이 글 속에는 은연중에 전통적 중국의학(中醫)에 대한 루쉰의 신랄한 풍자가 숨어 있다.
앓는 궁녀들에 ‘장정 약간 명’ 처방
현재 중국에서는 중의학과 그다지 관련도 없는 인문사회 학계에서 전통적 중국의학에 대해 새롭게 평가하려는 논의가 벌어지고 있다. 또한 서점가에서 중의 이론을 쉽게 설명한 책들이 독자들의 환영을 받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동향을 전하는 글을 읽다가 예전에 읽었던 이 이야기가 불쑥 생각이 난 것이다. 루쉰이 중국의학을 통렬하게 비판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이야기이다. 중의에 대한 루쉰의 비판적 태도는 이른바 ‘국수(國粹)’ 전체에 대한 비판의 기점이기도 하다. 그는 중국의학을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 사기꾼”이라고 단언했다. 루쉰의 열렬한 옹호자를 자임하는 리쩌허우(李澤厚)조차 중국의학과 경극 등에 대한 루쉰의 태도는 너무 한쪽에 치우친 각박한 견해라고 비판할 정도로 이러한 견해는 사실 냉정을 잃은 것이었다. 루쉰과 중의의 불행한 만남은 어린 시절 아버지(周伯宜)의 치료를 담당한 의사의 치료에 대한 불신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지금까지 누군가가 중의가 정말 믿을 만하다, 처방이 영험이 있다고 말할지라도 나는 도무지 믿지 않았다. 당연히 그 중의 대부분은 그들이 내 부친의 병을 잘못 치료한 때문이었지만 아마 직접 앓아본 병에 대한 스스로의 개인적인 원한도 얼마간 끼어 있었던 것이다.” 의사가 되기 위해 일본 센다이의 의학전문학교에 유학하던 시절에 받았던 서양의학 교육의 영향은 중국의학에 대한 그의 부정적 태도를 더욱 강화시켰다. 루쉰은 13살 때(1893)부터 16살까지(이 사이에 청일전쟁이 벌어진다) 아주 감수성이 예민한 시기에 4년간 아버지의 병수발을 들기 위해 집안의 값나가는 물건을 전당포에 맡기고 멸시를 받아가며 얻은 돈으로 약방에 가서 약을 지어와야만 했다. 그런데 처방전에 써 있는 약들은 ‘장정 약간 명’ 정도는 아니었지만 대부분 겨울철 갈대뿌리, 3년 서리 맞은 사탕수수, 귀뚜라미 한 쌍(주의할 점: 처음에 짝을 지은 것, 다시 말해서 본래부터 한 둥지에 있던 것), 열매 달린 평지목(平地木), 패고피환(낡아빠진 북가죽으로 만든 환약)같은 구하기 힘든 것들이었다. 고생의 보람도 없이 루쉰의 부친은 4년을 앓다가 37살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하직한다. 나중에 루쉰은 특히 ‘귀뚜라미 한 쌍’에 대해서 “곤충도 정조를 지켜야 하는지 재취를 하거나 재가를 해서는 약재로 쓰일 자격조차 없는 것 같다”고 신랄하게 비꼬고 있다. 또한 아버지를 치료한 의사인 ‘천롄허(陳蓮河)’(가명)에 대해서도 “이따금 길거리에서 그가 세 사람이 메는 가마를 타고 날을 듯이 지나가는 것을 볼 수 있을 뿐이다. 소문으로는 그는 아직도 건재하며, 개업을 하는 한편 ‘중의 무슨 학보’를 주재하며 외과에만 능한 양의들을 상대로 크게 싸움을 하고 있다고 한다” 고 싸늘하게 냉소를 던지고 있다.(<아버지의 병>) 병도 못 고치는 돌팔이 의사인 주제에 비싼 의료비를 챙겨 호의호식하는 것도 모자라 무슨 학회지까지 만들려고 동분서주하고 있다니 참으로 가소롭고도 개탄할 노릇이라는 식이다. 루쉰의 부친 병수발 보람없이 하직
애증이 분명한 루쉰 글의 매력에 빠졌던 나는 <아버지의 병>을 처음 접했을 때 당연히 루쉰의 부친을 치료한 의사가 ‘돌팔이’라고 생각했고 ‘귀뚜라미 한 쌍’의 처방에 대해서는 고소(苦笑)를 금치 못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중의에 대한 재평가를 계기로 읽게 된 어떤 글을 보니 루쉰의 아버지를 치료한 의사는 본명이 허롄천(何廉臣)(앞서 말한 천롄허라는 가명은 이를 뒤집어 놓은 것이다)으로 샤오싱 일대의 명의였다. 또한 그의 처방이 그렇게 잘못된 것도 아니었다. 루쉰의 아버지는 울화가 쌓여 피를 토하고, 전신이 붓는 부종 증상을 보이다가 간경화(혹은 간암?)로 죽었는데, 귀뚜라미(원래의 짝), 평지목, 패고피환 등은 원래 모두 간병(肝病)에 쓰는 약이라는 것이다. 또한 귀뚜라미는 약이 아니라 약인(藥引)으로 처방된 것이다. 약인은 처방 가운데 여러 가지 다른 약을 병이 난 부위로 인도하는 작용을 하는 약물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아버지의 병’이 원래 고치기 어려운 병인데다가 당시 의료 수준의 한계가 더해져 사망에 이른 것이지 잘못 치료했다고는 말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현대 중국의 성인’인 루쉰도 이 문제에서만은 과오를 범하고 있다는 것이다.
중의에 대한 그의 폄훼에는 스스로 인정했듯이 사원(私怨)도 작용했지만 당시 시대적 분위기 또한 그러하였다. 그 당시의 쟁쟁한 엘리트들은 거의 모두가 중의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량치차오(梁啓超)는 “중의도 병을 잘 치료할 수는 있지만 어떻게 병을 잘 치료했는지 그 원리를 분명히 잘 설명하는 사람은 없다.”고 지적했다. 그건 “중국의 의학이 과학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원리에 대해 대답할 수 없었던 것이다.”라고 천뚜슈(陳獨秀)는 화답했다. 후스(胡適)는 심지어 이렇게 말했다. “양의(중국에서는 西醫라고 한다)는 환자가 어떤 병을 얻었는지 분명히 말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비록 병을 고치지는 못하더라도 양의는 과학적이다. 중의는 비록 병을 잘 고쳐도 환자가 무슨 병을 앓았는지 분명히 말하지 못하기 때문에 중의는 비과학적이다.” 중의에 대한 부정적 평가가 이렇게 단지 엘리트들 사이에서 논의되는 정도에서 그친 것이 아니다.
중의가 살려낸 사람 덕분에…
난징에 도읍을 막 정한 국민당 정부는 1929년 실제로 중의를 폐지하려고 하였다. 의료업에 종사한지 20년이 안된 50세 이하의 구의(舊醫, 즉 중의)는 새롭게 등록해야 한다는 법안이 양의의 주도로 통과되었다. 등록해서 보충교육을 받고 시험에 합격해야만 영업을 허가했다. 이에 분노한 중의들이 반대운동을 펼치는 가운데 눈길을 끄는 이런 주장이 있었다. “중의 때문에 중국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인구를 가지게 되었다!” 최근 중국의 인터넷을 검색하다보니 중국의 누리꾼이 이와 유사한 주장을 펼치고 있는 경우도 있었다. “중의를 부정하는 자는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중의가 없었더라도 우리의 선조들은 어떻게 생존할 수 있었겠는가?” 중국의학 때문에 중국의 인구가 이렇게 많아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무튼 중국의 많은 인구와 낙후된 의료 위생 상황은 결국 국민당 정부로 하여금 손을 들게 만들었다. 신중국 성립 이후 마오는 중의에 대해 상당히 호의적이었다. 양의는 중의에게 배워야 한다는 등 중의를 위해 많은 말을 해주었기에 중의는 보존될 수 있었다. “중국의 의약학은 위대한 보고이다. 마땅히 발굴하고 수준을 높이도록 노력해야 한다. 양의는 중의를 학습함을 통해 중의와 양의의 경계를 없애서 통일된 새로운 의학을 완성할 수 있고 전 인류에 더 많은 공헌을 이룩할 수 있을 것이다.”
중국에서도 중의는 양의보다 지위가 낮고, 보통의 환자들도 먼저 양의를 찾고 거기서 고치지 못할 경우에 중의를 찾는 것이 일반적 현실이다. 양의가 주류 의학인 사정은 우리와 같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에 의해 ‘약찌꺼기’가 되어가는 농민과 같은 사회적 약자들은 첨단 의료설비에 의한 대도시의 ‘과학적’이지만 비싼 치료의 혜택을 누리기도 힘들고 또한 누릴 경제적 여유도 점점 없어져 가고 있다. 예방과 양생을 중시한 중의와 같은 전통의학을 다시 돌아보게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최고의 의사는 아직 발병하지 않은 병을 치료하고 중간 정도의 의사는 막 발병하려는 병을 치료하며, 가장 수준이 낮은 의사가 이미 발병한 병을 치료한다.”(손사막)고 하지 않았는가.
황희경/영산대 교수·중국철학
현재 중국에서는 중의학과 그다지 관련도 없는 인문사회 학계에서 전통적 중국의학에 대해 새롭게 평가하려는 논의가 벌어지고 있다. 또한 서점가에서 중의 이론을 쉽게 설명한 책들이 독자들의 환영을 받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동향을 전하는 글을 읽다가 예전에 읽었던 이 이야기가 불쑥 생각이 난 것이다. 루쉰이 중국의학을 통렬하게 비판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이야기이다. 중의에 대한 루쉰의 비판적 태도는 이른바 ‘국수(國粹)’ 전체에 대한 비판의 기점이기도 하다. 그는 중국의학을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 사기꾼”이라고 단언했다. 루쉰의 열렬한 옹호자를 자임하는 리쩌허우(李澤厚)조차 중국의학과 경극 등에 대한 루쉰의 태도는 너무 한쪽에 치우친 각박한 견해라고 비판할 정도로 이러한 견해는 사실 냉정을 잃은 것이었다. 루쉰과 중의의 불행한 만남은 어린 시절 아버지(周伯宜)의 치료를 담당한 의사의 치료에 대한 불신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지금까지 누군가가 중의가 정말 믿을 만하다, 처방이 영험이 있다고 말할지라도 나는 도무지 믿지 않았다. 당연히 그 중의 대부분은 그들이 내 부친의 병을 잘못 치료한 때문이었지만 아마 직접 앓아본 병에 대한 스스로의 개인적인 원한도 얼마간 끼어 있었던 것이다.” 의사가 되기 위해 일본 센다이의 의학전문학교에 유학하던 시절에 받았던 서양의학 교육의 영향은 중국의학에 대한 그의 부정적 태도를 더욱 강화시켰다. 루쉰은 13살 때(1893)부터 16살까지(이 사이에 청일전쟁이 벌어진다) 아주 감수성이 예민한 시기에 4년간 아버지의 병수발을 들기 위해 집안의 값나가는 물건을 전당포에 맡기고 멸시를 받아가며 얻은 돈으로 약방에 가서 약을 지어와야만 했다. 그런데 처방전에 써 있는 약들은 ‘장정 약간 명’ 정도는 아니었지만 대부분 겨울철 갈대뿌리, 3년 서리 맞은 사탕수수, 귀뚜라미 한 쌍(주의할 점: 처음에 짝을 지은 것, 다시 말해서 본래부터 한 둥지에 있던 것), 열매 달린 평지목(平地木), 패고피환(낡아빠진 북가죽으로 만든 환약)같은 구하기 힘든 것들이었다. 고생의 보람도 없이 루쉰의 부친은 4년을 앓다가 37살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하직한다. 나중에 루쉰은 특히 ‘귀뚜라미 한 쌍’에 대해서 “곤충도 정조를 지켜야 하는지 재취를 하거나 재가를 해서는 약재로 쓰일 자격조차 없는 것 같다”고 신랄하게 비꼬고 있다. 또한 아버지를 치료한 의사인 ‘천롄허(陳蓮河)’(가명)에 대해서도 “이따금 길거리에서 그가 세 사람이 메는 가마를 타고 날을 듯이 지나가는 것을 볼 수 있을 뿐이다. 소문으로는 그는 아직도 건재하며, 개업을 하는 한편 ‘중의 무슨 학보’를 주재하며 외과에만 능한 양의들을 상대로 크게 싸움을 하고 있다고 한다” 고 싸늘하게 냉소를 던지고 있다.(<아버지의 병>) 병도 못 고치는 돌팔이 의사인 주제에 비싼 의료비를 챙겨 호의호식하는 것도 모자라 무슨 학회지까지 만들려고 동분서주하고 있다니 참으로 가소롭고도 개탄할 노릇이라는 식이다. 루쉰의 부친 병수발 보람없이 하직
처방전에 따라 약재를 고르고 있는 젊은 중약사. 중의는 폐지하고 중약만을 살리자는 일각의 주장도 있다고 한다. 중의의 운명은 전통문화 전체가 마주한 곤경이기도 하다.
황희경/영산대 교수·중국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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