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자유이야기 /
꽃들은 ‘어느 날 갑자기’ 피는 걸까? 겨우내 삭막했던 아파트 옆 중랑천길이 어느새 하얗게, 노랗게 벚꽃과 개나리로 눈이 부시다. 어젯밤 자전거 도로로 산책을 나갔다가 가로등 불빛 사이 꽃들이 너무나 아름다워 한없이 바라보았다. 계절이 지나가고 있는지도 모른 채 또 앞만 보고 살고 있는가? 반성하며 잠시 마음을 붙잡았다.
그러고 보니 한참 동안 고궁을 찾지 못했다. 그래서 요즘 생활이 더 많이 엉켜 있었나? 유난히 힘들었고 더 고단했던 것 같다. 빨리 일을 처리하려 했지만 오히려 더 꼬였고.
옛날 같으면 이럴 때 항상 고궁을 찾았고 위로를 받고 돌아오곤 했는데 요즘은 자꾸 내 힘으로 해결하려고만 하는 이상한 고집을 느낀다. 나이를 먹을수록 겸손해야 할 텐데 교만해지고 조급해지는 것 같아 불안하다. 두 아이가 어렸던 1980년대 후반. 남편의 해직으로 경제적으로, 육체적으로 무척 힘들었다. 그때 우리 가족을 따듯하게 받아준 곳은 서울 곳곳에 있는 고궁이었다. 어린아이들에게도 훌륭한 놀이터였다. 신나는 놀이기구가 있는 놀이공원이 아니었지만 드넓은 고궁의 뜰과 연못, 분수, 꽃과 나무들은 여느 놀이공원보다 더 화려했고 아이들의 신나는 광장이 되었다. 고궁은 전철로 어디든 갈 수 있어 자가용이 없어도 서글프지 않았다. 계절마다 색색의 꽃들이 아름다웠던 덕수궁, 경복궁, 종묘, 창경궁 그리고 창덕궁…. 패스트푸드의 유혹에 안 빠지고 집에서 싸 간 김밥을 맛있게 먹을 수 있어 여유로웠고 기계 소음에 묻혀 한참을 줄서기하는 대신 흙과 돌계단을 마음껏 오르내리며 뛰어노는 아이들. 그 풍경을 바라보며 저만치 떨어져 책을 읽던 그 여유와 한가함.
고궁에 들어서면 이상하게 나는 마음이 편해지고 나직하게 들려오는 숨소리에 발걸음이 절로 느려진다. 천천히 곳곳에 스며 있는 역사를 읽으며 고궁을 걷다 보면 어느새 나는 시간을 거느리는 철학자가 된다. 담 밖의 현대식 빌딩에 기죽지 않고 날렵한 추녀를 늘어뜨리고 위엄을 갖춘 궁궐의 자태는 눈치보며 재빠르게 변신하며 살고자 했던 나에게 ‘느리게! 소신있게!’ 하며 경고를 보낸다.
“엄마, 임금님의 병을 고치기 위해 거북이가 데려온 토끼는 어디 있어요?” 네살배기 아이의 상상밖의 질문에 당황한 나는 “거긴 바닷속 용궁이었어….” “그럼 바다에도 이렇게 크고 멋진 궁궐이 있어요?” “그럼. 인어공주도 살잖아.” “ 아, 그렇구나….”
그 아들이 어느새 수험생인 열아홉살이 되었다. 엄마 마음만큼 공부를 안 하는 아들이 불안해 어제도 조바심을 냈다. 후회할 걸 뻔히 알면서 말이다. 아, 내가 자유로워야 하는데. 느긋해야 하는데…. 아, 맞다. 고궁! 왜 이 생각을 못하고 아들을 닦달했을까? 수험생 본인이 가장 힘든 건데. 이번 주말에는 꼭 고궁을 걸으리라. 분명 느리게, 느리게 하며 위로와 힘을 주리라.
김혜영/서울 도봉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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