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테르는 그의 철학소설 <캉디드>에서 말로 먹고사는 성직자와 법관을 가장 혹독하게 풍자한다. 아테네출판사의 <낙천주의자, 캉디드>에 실린 모로 르 쥔(1741~1814)의 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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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테르의 <캉디드> 볼테르의 <캉디드>(1759년)는 순진한 낙천주의를 풍자한 철학소설로 잘 알려져 있다. 순박한 청년 캉디드는, 낙천주의를 설파하고 그를 위해 논쟁하기 바쁜 스승 팡글로스의 가르침대로, 신이 이 세상을 가능한 한 최선으로 창조했다는 것을 믿는다. 그런데 남작의 딸 퀴네공드를 사랑한다는 이유로 성에서 쫓겨난 캉디드는 세상을 방랑하며 난파, 지진, 질병, 약탈, 전쟁, 광신과 종교재판 등 온갖 재해와 불행을 경험한다. 그런 가운데 비관주의자 마르탱을 만나 논쟁하고 혼란에 빠진다. 천신만고 끝에 콘스탄티노플에 이른 캉디드는 그 근교에서 농원을 가꾸며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이렇게 끝나는 소설에서 우리는 많은 평론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낙천주의와 비관주의를 벗어나 인간의 운명은 오직 밭을 일구어가듯이 스스로의 삶을 개척해 가는 것이라는 볼테르의 계몽적 메시지를 엿볼 수도 있다. 하지만 철학적 입장에서 이 작품을 좀 더 세밀하게 볼 필요가 있다. 우선 사람들이 ‘믿음’ 때문에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에 대한 볼테르의 경고를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 극단의 낙천주의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세상은 최선을 향해 갈 것이라고 믿을 것이고, 극단의 비관주의자는 어떤 경우라도 세상은 최악을 향해 갈 것이라고 믿을 것이기 때문에, 행위의 반성과 삶의 개선을 추구하지 않게 된다. 맹신은 사람들을 권태와 방탕 그리고 가난으로 몰고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캉디드 일행이 콘스탄티노플 근교에서 만난 노인은 가족과 함께 작은 농원을 가꾸면서 살고 있다. 손님에게 신선한 과일과 향내나는 커피를 대접하며 그는 삶의 보람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노동은 우리를 커다란 세 가지 악, 즉 권태와 방탕 그리고 가난에서 해방되게 하는 것이지요.” 이 점에서 이 작품이 진정으로 겨냥하고 있는 것은 낙천주의 그 자체가 아니라, 맹신 때문에 무력해지는 인간의 삶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볼테르는, 그릇된 믿음은 각자 자신이 믿는 것을 지키기 위해서 논쟁의 과열을 불러온다는 것을 경고하고 있다. 볼테르는 그의 저서 <철학 사전>에서 ‘미신’을 이렇게 정의한다. “미신은 온 세상을 불 위에 올려놓지만, 철학은 그것을 끄는 일을 한다.” 즉 미신은 사람들을 불필요한 논쟁으로 달아오르게 하지만, 철학의 역할은 사람들을 냉철한 생각으로 초대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이와 함께 진정한 철학은 사람들을 ‘말의 삶’에서 ‘일의 삶’으로 인도할 때 그 역할을 다한다는 것이다. <캉디드>에서 가장 혹독한 풍자의 대상은 성직자와 법관이다. 그들은 말로 먹고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말로 권력을 행사하고 부를 축적하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볼테르는 이렇게 주장하고 싶은 것이다. 말로 착취하지 말고, 일로 베풀라! 말로 살지 말고, 일로 살라! “성직자와 법관은 말로 먹고사는 자들이다.
말로 권력을 행사하고 부를 축적한다.
말로 착취하지 말고, 일로 배풀라” 물론 볼테르를 포함하여 철학자들도 말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들에겐 다른 가능성이 있다. 이는 두 가지 관점에서 볼 수 있는데, 우선 자신의 말을 실천할 때 철학자는 일로 베푸는 역할을 할 수 있다. 실제로 볼테르가 철학사에 남긴 가장 큰 공헌은 그 자신이 바로 실천하는 지식인의 전형이었다는 것이다. 이와 연관하여 또한 중요한 것은, 철학은 말과 글이 일이 되고 놀이가 되는 삶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문화적 창조자로서 철학자의 역할이 있다. 이는 왕성한 문예 활동으로써 볼테르 자신이 몸소 실천해 보인 것이자, <캉디드>의 대단원에서 그가 던진 메시지이다.
못 말리는 팡글로스의 낙천주의 설명 앞에서 캉디드는 말한다. “정말 멋진 말이군요. 하지만 이제 우리의 정원을 경작해야지요.” 여기서 볼테르가 쓴 ‘경작하다(cultiver)’는 말은 복합적이다. 철학의 역할이라는 관점에서는 철학자의 문화적 창조를 내포한다. 철학은 말과 글이 일과 놀이가 되는 삶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유용함’과 ‘즐거움’ 두 가지가 다 충족되는 세상을 만드는 데 일익을 담당하기 때문이다. 캉디드가 돌아다닌 곳 중에서 “이 두 가지가 모두 충족되도록 꾸며진 장소”는 한 곳밖에 없었다. 이상향인 엘도라도뿐이었다. 유용함과 즐거움이 함께 충족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것, 그것이 볼테르의 철학이 이상으로 설정하고 지향했던 것이다.
영산대 교수 anemos@ysu.ac.kr
볼테르의 <캉디드> 볼테르의 <캉디드>(1759년)는 순진한 낙천주의를 풍자한 철학소설로 잘 알려져 있다. 순박한 청년 캉디드는, 낙천주의를 설파하고 그를 위해 논쟁하기 바쁜 스승 팡글로스의 가르침대로, 신이 이 세상을 가능한 한 최선으로 창조했다는 것을 믿는다. 그런데 남작의 딸 퀴네공드를 사랑한다는 이유로 성에서 쫓겨난 캉디드는 세상을 방랑하며 난파, 지진, 질병, 약탈, 전쟁, 광신과 종교재판 등 온갖 재해와 불행을 경험한다. 그런 가운데 비관주의자 마르탱을 만나 논쟁하고 혼란에 빠진다. 천신만고 끝에 콘스탄티노플에 이른 캉디드는 그 근교에서 농원을 가꾸며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이렇게 끝나는 소설에서 우리는 많은 평론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낙천주의와 비관주의를 벗어나 인간의 운명은 오직 밭을 일구어가듯이 스스로의 삶을 개척해 가는 것이라는 볼테르의 계몽적 메시지를 엿볼 수도 있다. 하지만 철학적 입장에서 이 작품을 좀 더 세밀하게 볼 필요가 있다. 우선 사람들이 ‘믿음’ 때문에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에 대한 볼테르의 경고를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 극단의 낙천주의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세상은 최선을 향해 갈 것이라고 믿을 것이고, 극단의 비관주의자는 어떤 경우라도 세상은 최악을 향해 갈 것이라고 믿을 것이기 때문에, 행위의 반성과 삶의 개선을 추구하지 않게 된다. 맹신은 사람들을 권태와 방탕 그리고 가난으로 몰고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캉디드 일행이 콘스탄티노플 근교에서 만난 노인은 가족과 함께 작은 농원을 가꾸면서 살고 있다. 손님에게 신선한 과일과 향내나는 커피를 대접하며 그는 삶의 보람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노동은 우리를 커다란 세 가지 악, 즉 권태와 방탕 그리고 가난에서 해방되게 하는 것이지요.” 이 점에서 이 작품이 진정으로 겨냥하고 있는 것은 낙천주의 그 자체가 아니라, 맹신 때문에 무력해지는 인간의 삶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볼테르는, 그릇된 믿음은 각자 자신이 믿는 것을 지키기 위해서 논쟁의 과열을 불러온다는 것을 경고하고 있다. 볼테르는 그의 저서 <철학 사전>에서 ‘미신’을 이렇게 정의한다. “미신은 온 세상을 불 위에 올려놓지만, 철학은 그것을 끄는 일을 한다.” 즉 미신은 사람들을 불필요한 논쟁으로 달아오르게 하지만, 철학의 역할은 사람들을 냉철한 생각으로 초대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이와 함께 진정한 철학은 사람들을 ‘말의 삶’에서 ‘일의 삶’으로 인도할 때 그 역할을 다한다는 것이다. <캉디드>에서 가장 혹독한 풍자의 대상은 성직자와 법관이다. 그들은 말로 먹고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말로 권력을 행사하고 부를 축적하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볼테르는 이렇게 주장하고 싶은 것이다. 말로 착취하지 말고, 일로 베풀라! 말로 살지 말고, 일로 살라! “성직자와 법관은 말로 먹고사는 자들이다.
말로 권력을 행사하고 부를 축적한다.
말로 착취하지 말고, 일로 배풀라” 물론 볼테르를 포함하여 철학자들도 말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들에겐 다른 가능성이 있다. 이는 두 가지 관점에서 볼 수 있는데, 우선 자신의 말을 실천할 때 철학자는 일로 베푸는 역할을 할 수 있다. 실제로 볼테르가 철학사에 남긴 가장 큰 공헌은 그 자신이 바로 실천하는 지식인의 전형이었다는 것이다. 이와 연관하여 또한 중요한 것은, 철학은 말과 글이 일이 되고 놀이가 되는 삶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문화적 창조자로서 철학자의 역할이 있다. 이는 왕성한 문예 활동으로써 볼테르 자신이 몸소 실천해 보인 것이자, <캉디드>의 대단원에서 그가 던진 메시지이다.
김용석/영산대 교수 anemos@ys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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