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식을 취하면서 담소하고 있는 농민꿍들. 농민꿍이 1년에 천만명이나 증가해도 중국이 그런대로 안정된 상태로 유지되는 것은 그들이 불평등한 대접을 받더라도 차라리 도시로 나가는 것이 농촌의 농민으로 머무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변하는 중국, 변하지 않는 중국 ⑫
최근 우연한 기회를 통해 루쉐이(육학예)를 비롯한 중국의 여러 사회학자들을 만나 농민공(農民工) 문제에 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루쉐이는 중국 사회과학원 사회학연구소의 전 소장이었던 원로학자로, 사회학 이론과 농촌발전 이론 분야의 전문가다. 중국의 이른바 삼농(三農) 문제, 즉 농민의 고난, 농촌의 빈궁화, 농업의 위기 문제는 매우 심각하기 때문에 현재의 중국 지도부가 사회주의 신농촌건설을 국정의 주요 과제로 설정하고 있다는 소식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농민공은 개념조차 생소했는데 이분들과의 만남을 통해 문제의 심각성을 새롭게 깨달을 수 있었다. 알고 보니 그들은 농민꿍이란 개념을 처음으로 제출한 분들이었다. “그대와 한 자리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십년 책 읽는 것보다 낫네(聽君一席話 勝讀十年書)”라는 중국의 말이 절로 생각나는 자리였다.
이농 막으려던 호적법이 족쇄로
중국은 지난 세기 1950년대 말에 발생한 3년 동안의 경제적 곤란 상황에서 야기된 식량부족 사태에 대응하기 위해 도시와 농촌의 호적을 달리하는 이원적 정책을 펼쳐왔다. 호적상의 신분을 농업과 비농업으로 나누어 농업인구의 비농업인구로의 전환을 엄격히 제한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80년대 중반 이후 경제체제 개혁이 도시로 확대되면서 도시의 2-3차 산업이 대폭 발전하였고 이에 따라 많은 노동력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농촌에서 도시로 “맹목적으로 유동하는(盲流)” 농민이 생겨나게 된다. 중국 인민대학 농업과 농촌발전학원 원장이며 삼농문제 전문가인 원톄쥔(溫鐵軍)에 따르면 이러한 농민공의 유동 문제는 1992년 도시에서 식량 배급표(粮票)를 없애버리는 조치를 단행한 이후 진정으로 출현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전에도 인구의 유동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 숫자가 적었다. 하지만 농민도 도시에 와서 일하고 번 돈으로 식품과 생활필수품을 살 수 있게 된 조처 덕분에 숫자는 크게 증가한다. 이렇게 해서 생겨난 농민꿍의 숫자가 당시에 이미 4천만 명이었다. 덩샤오핑의 남순강화 이후 중국의 경제는 쾌속 성장기에 진입, 농민꿍은 매년 1천만 명 정도 증가하여 2005년의 통계에 따르면 당시의 3배인 1억2천만 명에 달하고 있다고 한다.
농민공이란 이처럼 거대한 전환기에 처해 있는 중국사회의 특수한 계층으로, 농민도 아니고 노동자도 아닌 “어정쩡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을 말한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호적상으로는 농민의 신분이지만 실제로는 도시에 와서 노동자의 역할을 하는 사람을 말한다. 전에는 일반적으로 그냥 민공이라고 불렀다. 사전에도 올라 있는 민공이란 말은 첫째 정부가 동원하거나 호소해서 도로나 제방 혹은 군수물자 수송 등의 일에 참가한 사람, 둘째 도시에 와서 노무에 종사하는 농민을 지칭한다. 그러나 농민공은 과거 민공이라고 지칭하던 때보다 숫자가 훨씬 많고, 아무런 조직이나 기관의 보호를 받지 못한다는 점이 민공과 다르다. 그리하여 농민공이 민공을 대신한 새로운 개념으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2억명 달하는 농민 호적의 도시 노동자 ‘농민공’
호적 제약 때문에 임금 3분의 1밖에 못받아
도-농차별·노-농차별·육체노동의 차별 한몸에
세계적 가격경쟁력 뒤에는 농민공의 희생이 있다 이들의 평균 임금은 농민이라는 호적상의 제약 때문에 같은 일을 하고도 도시 노동자 임금의 3분의 1 내지 절반 수준이라고 한다. 중국 상품이 세계시장에서 가격 경쟁력이 있는 이면에는 이런 농민공의 희생이 있었던 것이다! 어느 나라나 산업화와 도시화의 과정에서 이와 유사한 문제가 발생하지만 다른 나라의 경우 그 인구가 적고 비교적 단기간의 현상에 불과했다면 중국의 경우는 오랜 기간에 걸쳐 많은 인구와 관련된 문제라는 점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 넓은 의미에서 농민공은 농촌의 향진기업에서 일하는 “토지에서부터는 벗어났지만 고향으로부터 벗어나지 않은” 사람과 다른 도시로 나가 2-3차 산업에 종사하는 “토지와 고향 모두로부터 벗어난” 사람 모두를 포괄한다. 좁은 의미로는 철새와 같이 떠도는 후자만을 지칭하는데, 양자를 포괄하면 무려 2억이라는 어마어마한 인구에 달한다. 당연히 이들로 인해 여러 가지 사회문제가 파생되고 있다. 따라서 농민공의 문제는 중국이 마주한 여러 가지 사회문제 중에서도 정말 중대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예를 들어 임시거주증이 없다는 이유로 구속 수감되었다가 구타당해 사망함으로써 인권과 호적제도 개선이라는 화두를 중국사회에 던진 광둥의 쑨즈깡 사건도 사실 농민꿍의 문제와 연관된 것이다.
농민공에 관한 대화를 나눈 이후에 관련 자료를 찾아 읽어보면서 생각나는 일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식량 배급표에 관한 추억이다. 내가 처음 중국에 갔던 때가 마침 1992년이었는데 그 당시 주로 하던 일이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자전거를 타고 베이징 시내를 “싸돌아다니는” 일이었다. 하긴 백번 들어도 잘 들리지도 않았다. 사회주의의 추억 ‘식량 배급표’
하루는 어떤 가게 앞에 많은 사람이 줄서 있길래 무슨 일인가 호기심이 발동하여 나도 따라 줄을 서본 일이 있었다. 들리지 않으니 잘 말할 수도 없어서 물어보지도 못하고 “무슨 일예요?”라는 메시지를 가득 담은 눈으로 기웃거리자 주변에 있던 사람에게 내 마음이 전달됐는지 어떤 친절한 분이 웃으면서 작은 종이를 건네주었다. 예전에 쓰던 우리나라의 버스 회수권만한 크기였는데 살펴보니 식량 배급표였다. 나는 ‘식량배급표’를 손으로 만지면서 속으로 감탄했다. 아하, 이게 바로 사회주의구나! 나중에 이걸 주고 쌀을 평소보다 조금 싸게 산 일이 있는데 외국인으로서 내가 중국의 사회주의를 손으로 직접 느낀 것은 이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아니었나 싶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니 역이나 건설현장을 지나다가 도처에서 마주친 허름하다 못해 비루한 복장을 하고 피곤한 표정을 짓던 수많은 중국인들과 그 당시 마지막으로 보았던 식량 배급표는 서로 연관이 있었던 것이다.
다른 하나는 “최후의 유학자”로 유명한 량수밍(양수명, 1893-1988)에 관한 일화이다. 그는 신중국 성립 이전에 10년 동안 향촌건설운동에 종사한 일도 있으며 중국민주동맹의 사무국장으로 일하면서 국민당과 공산당의 사이에서 양자를 조화시키려고 노력했던 저명한 민주인사였다.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제3세력을 결집시켜 항일 민족통일 전선을 구축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와중에 1938년 옌안을 방문해 항일전쟁에 관한 전망과 계급투쟁의 문제를 두고 마오와 여러차례 격의없는 대화를 나눈 적도 있었다. 그와 마오는 동년배였다. 마오는 정권을 잡은 이후에도 그에게 전용차를 보내 중난하이에서 접견하는 등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중국공산당 중앙은 1953년 9월 중순에 그를 비롯한 100여명의 민주인사에게 당의 “총노선”에 관한 의견을 물은 일이 있었다. 량수밍은 회의석상에서 폭탄발언을 한다. 어떤 농촌간부들은 지방정부를 장악해서 온갖 위법행위를 저지르고 있으며 생산도 그다지 나아지지 않고 있다, 농민은 배불리 먹지도 못해서 도시로 와서 막노동에 종사하기도 하고 있다, 도시의 노동자와 농촌 농민의 생활은 천양지차다, 공산당은 농민을 잊지 말고 인정(仁政)을 펼치기 바란다 등등. 그러자 마오는 량수밍에게 엄청난 발언을 퍼부었다. 장제스가 총으로 사람을 죽였다면 량수밍 당신은 붓으로 사람을 교묘하게 죽이는 살인범이라느니, 사회주의 총노선에 은근히 반대하면서 노동자와 농민의 연대를 파괴하고 있다느니, 농민혁명에 성공한 공산당 앞에서 감히 농민을 운운하냐는 등 거칠게 마구 비판했다.
삼농 문제 심각한 요즘
“공산당은 농민을 잊지 말고
인정을 펼치기 바란다”
마지막 유학자의 직언이
새삼 그리워진다
량수밍은 이에 불복해 자신은 결코 총노선에 반대하거나 노동자와 농민의 연대를 파괴한 적이 없다고 항변했다.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닌데 마오 주석이 오해했으니 말을 거둬들여라, 당신에게 이런 아량이 있는지 묻고 싶다고 카랑카랑하게 항의했다. 커다란 소동이 일어난 것은 불문가지였다. 반동분자에게 민주적 권리는 없다느니, 헛소리 집어치라는 고성이 난무했다. 량수밍은 이에 굴하지 않고 더 발언할 기회를 달라고 요구하여 결국 공개표결에 부쳤지만 결과는 자명한 일이었다. 그 후 량수밍은 중국의 정치적 무대에서 사라졌다.
처음 이 일화를 접했을 때 절대권력 앞에서 직언을 할 수 있었던 량수밍의 용기에 탄복했으며 그에 대한 마오의 비판은 냉정과 아량을 잃은 지나친 발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농촌이 도시를 포위하는 전략으로 혁명에 성공한 마오 앞에서 농민 운운했던 그의 발언도 ‘오버’한 것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다시 돌이켜보면 농촌을 중시하라는 그의 발언에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든다.
량수밍은 “삼군의 장수는 빼앗을 수 있으나 필부의 뜻은 빼앗을 수 없는” 그런 강골의 인물이었다. 그가 정치의 무대에서 일찍 사라지지 않았다고 해서 중국의 삼농문제가 발생하지 않은 것은 결코 아니다. 하지만 노동자와 농민의 차별, 도시와 농촌의 차별,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차별이라는 중국의 삼대 차별의 모순을 한 몸으로 체현하고 있는 농민꿍을 생각할 때 농민을 위해 감히 발언할 수 있었던 량수밍과 같은 인물이 새삼 그리워진다.
황희경/영산대 교수·중국철학
만년의 량수밍 모습.
호적 제약 때문에 임금 3분의 1밖에 못받아
도-농차별·노-농차별·육체노동의 차별 한몸에
세계적 가격경쟁력 뒤에는 농민공의 희생이 있다 이들의 평균 임금은 농민이라는 호적상의 제약 때문에 같은 일을 하고도 도시 노동자 임금의 3분의 1 내지 절반 수준이라고 한다. 중국 상품이 세계시장에서 가격 경쟁력이 있는 이면에는 이런 농민공의 희생이 있었던 것이다! 어느 나라나 산업화와 도시화의 과정에서 이와 유사한 문제가 발생하지만 다른 나라의 경우 그 인구가 적고 비교적 단기간의 현상에 불과했다면 중국의 경우는 오랜 기간에 걸쳐 많은 인구와 관련된 문제라는 점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 넓은 의미에서 농민공은 농촌의 향진기업에서 일하는 “토지에서부터는 벗어났지만 고향으로부터 벗어나지 않은” 사람과 다른 도시로 나가 2-3차 산업에 종사하는 “토지와 고향 모두로부터 벗어난” 사람 모두를 포괄한다. 좁은 의미로는 철새와 같이 떠도는 후자만을 지칭하는데, 양자를 포괄하면 무려 2억이라는 어마어마한 인구에 달한다. 당연히 이들로 인해 여러 가지 사회문제가 파생되고 있다. 따라서 농민공의 문제는 중국이 마주한 여러 가지 사회문제 중에서도 정말 중대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예를 들어 임시거주증이 없다는 이유로 구속 수감되었다가 구타당해 사망함으로써 인권과 호적제도 개선이라는 화두를 중국사회에 던진 광둥의 쑨즈깡 사건도 사실 농민꿍의 문제와 연관된 것이다.
농민공에 관한 대화를 나눈 이후에 관련 자료를 찾아 읽어보면서 생각나는 일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식량 배급표에 관한 추억이다. 내가 처음 중국에 갔던 때가 마침 1992년이었는데 그 당시 주로 하던 일이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자전거를 타고 베이징 시내를 “싸돌아다니는” 일이었다. 하긴 백번 들어도 잘 들리지도 않았다. 사회주의의 추억 ‘식량 배급표’
식량배급표. 그밖에 기름표, 옷감표 등이 있었다.
황희경/영산대 교수·중국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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